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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23 달동네 책거리 72 : <책만 보는 바보>
  2. 2009.10.08 달동네 책거리 65 : <개밥바라기별>
달동네 책거리2009. 11. 23. 06:31
 <책만 보는 바보> - 안소영 

 
책만 보는 바보

<책만 보는 바보>

제목만 보면 어떤 책이라고 생각되나요?

좋은 책을 소개해 주는 서평집 같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간서치(看書痴)”란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까요?

“간서치(看書痴)”란 말 그대로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으로 “책벌레”를 가리키는 말이죠.

조선의 역사 속에서 “간서치”라 할 만한 인물을 꼽으라면, (어디까지나 지극히 저의 개인적인 취향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정조 이산,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청장관 이덕무,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청장관 이덕무는 아예 자기 자신을 “간서치”라고 부를 정도로 책 속에 파묻혀 지냈던 인물이죠.

이 책, <책만 보는 바보>는 그러니까 바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었던 이덕무(1741~1793), 그 지독한 책벌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자 안소영은 청장관 이덕무가 1761년 쓴 자서전 <간서치전>을 읽고 그에게 매료되어 이 책을 집필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것도 스스로 이덕무가 되어, 역사 속의 그를 버젓이 지금의 시대 안으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이덕무라는 역사 속 인물이 마치 내 옆에 앉아서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일생을 책 속에 파묻혀 책만 읽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생활력 없고 현실적이지 못한 무책임한 한량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덕무 그 자신은 결코 책만 보는 바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진정은 세상에 쓰임이 되는 사람이길 간절히 원했죠.

그런데 이 바람은 그에겐 넘지 못할 높은 산과도 같았습니다.

바로 “서자(庶子)”라는 그의 출신 성분 때문이었죠.

“...... 사람으로 태어나 가장 비참한 것은 쓰일 데가 없다는 것이다. 책만 파고들면 무엇 하나? 내 말과 글로는 세상을 조금도 바꾸어 놓지 못하는 것을. 몸을 움직여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이던가? 어렵게 뜻을 세웠다 하더라도 세울 뜻을 펼쳐 보일 데가 없는 나의 인생은 내내 외롭고 서럽기만 했다.....”

이덕무는 왕족의 후손이었으나 적자 혈통이 아닌 서자 혈통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돼 후손으로 이어진 서럽고 서러운 서자라는 핏줄.

이 보이지 않는 서러운 핏줄로 이덕무의 앞길은 가로막히고, 주눅들 수밖에는 없었죠. 그때마다 그는 “두려움과 무기력감”에 빠져 괴로워했다고 고백합니다.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

그 시대에 서자가 낄 자리는 도저히 없었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여 먹고살 방도를 찾아보려 하여도 양반의 핏줄이라 하여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존대를 받으며 구종을 부릴 수 있는 당당한 양반의 처지 또한 아니었죠. 그럴 때마다 그는 어머니가 물려준 보잘것없는 핏줄이 아니라, 아버지가 물려준 이기적인 양반의 핏줄이 한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책만 보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건 서러운 핏줄에 대한 한스러움과 어쩌지 못하는 신분에 대한 벽 때문이었던 거죠.


이서구, 유득공, 박제가, 백동수.

소위 백탑파라고 불리우는 이덕무의 깊은 벗들입니다.

명문가의 적자인 이서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서러운 핏줄인 서자 출신이죠.

이들의 사귐은... 참 다정하고 멋스럽습니다.

아끼던 일곱 권의 <맹자> 한 질을 팔아 생계를 꾸려야 했던 이덕무를 보며 자신이 아끼던 <좌씨춘추>를 팔아 술을 샀던 7살 아래의 유득공. 우수한 성적으로 무과에 합격했으나 서자 출신으로 오랫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해 산 속으로 들어간 2살 아래 처남 백동수,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연구에 능했으나 쓰일 곳이 없어 오히려 더 마음이 아팠던 9살 아래 박제가. 명문가의 후손으로 이덕무와는 무려 13살의 나이 차이가 있던 어린 이서구까지...

그들의 사귐에는 나이와 신분을 초월하는 깊이 그 이상의 것이 있었습니다.

특히 나이 차이가 가장 많았던 이서구와의 사귐은 “이심전심”의 마음까지도 전해집니다.

“......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벗이라 해도, 책의 향기를 코끝으로 먼저 느끼는 예민한 후각과 책을 만질 때마다 설레는 손끝의 미세한 떨림까지 시시콜콜 나누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서구와는 굳이 이러한 느낌과 취향을 꺼내어 나눌 필요도 없었다. 그도 역시 그러하였으므로 ...... 수십 년 동안 그와 나 사이에서 오고 간 책들은, 서로의 손대가 묻어 닳아 갔다 ......”

책을 손에 잡는 그 작은 공간이 온 우주를 다 담을 수 있을 만큼 드넓고도 신비로웠다고 말하는 이덕무. 그는 책을 읽기 위해 방에 들어서는 순간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이 모두 자신을 향해 눈길을 돌리는 것만 같다고 말합니다. 책과 눈이 마주치는, 그 책 속에 담긴 누군가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마주치는 설렘까지도 온전히 벗들과 나눌 수 있었던 그가 저는 참 부럽고도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이 책 속에는 그에게 서러운 핏줄을 잊고 더 큰 세계를 만날 수 있게 도와준 스승과의 인연도 담겨져 있습니다.

“공자가 말씀하시길...”을 스스로 “스승이 말씀하시길...”로 고쳐 읽었을 정도로 이덕무는 공자의 사상과 이론에 심취해 있었죠.

월식과 일식으로 지구의 자전을 설명한 담헌 홍대용.

그는 이 세상의 중심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며 우리나라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도 북쪽의 큰 땅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조선 양반들의 지나친 사대주의의 폐해를 꼬집는 의미심장한 말이라 할 수 있죠.

선입견을 버려야만 조선이 이롭게 변할 수 있다고 말한 연암 박지원.

선입견은 결국,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과 사물의 본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는 편견이기도 하다고 연암은 말합니다.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힌 세상은 새로운 활기라고는 없는 세상, 변화를 거부하는 낡은 것들로만 가득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죠.

조선에서도 알아주는 명문가의 자손인 연암은 자신보다 13살이나 어린, 그것도 서자 출신인 박제가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의복을 정갈하게 갖추고 인사까지 합니다.

심지어 헤어지는 자리에서 박제가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하네요.

“슬기로운 젊은이여! 부디 오래오래 사시게!”

이 두 스승은 그들을 자애로 대해줌으로써 세상 보는 눈을 바르게 열어 주었습니다. 자칫 기가 꺾이거나 흔들리기 쉬운 그들의 서러운 마음을 바로잡아 주고, 그들이 글을 쓰거나 문집을 낼 때마다 일일이 읽어 보고 격려해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스승들의 가르침과 격려가 있었기에 이들 서러운 서자들이 드디어 규장각 검서관이 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의 추천으로 연경사신단이 되어 연행길에 오른 이들은 탕탕평평의 정책을 표방한 정조의 부름을 받아 차례차례 대궐에 입궐하게 됩니다.

그 날의 감격에 대해 이덕무는 말합니다.

“...... 버려진 물건처럼 이리저리 구르던 우리들의 삶도 이제 쓰일 데가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기만 했다. 규장각 서고에 가득한 책들 속에서 좀벌레로 늙어 간다고 해도, 이 세상 어딘가에 나의 자리가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뽀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 세상의 빛을 향해 나온 책들처럼, 벗들과 나의 시대는 그렇게 새롭게 열리고 있었다......” 라고.

한때는 자식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재능을 보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 어린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이 영글어 갈 무렵에는 이 세상에 태어나 무슨 꿈을 꾸며 살아야 하는지 묻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고요. 철이 들어 자신들의 처지를 알고 체념한 듯 꽉 다문 입술을 보면 서글프기까지 했다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마음껏 같이 웃어 주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한 그 물음에 성의껏 대답해 줄 수 있게 되었노라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릿여릿한 뼈대와 무른 살들이 차츰 강건해지고 단단해지듯이, 품은 뜻에 따라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들을 진심으로 격려하고 축복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죠.

그리고 실제로 이들 서얼 출신 백탑파는 조선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깁니다.

박제가의 <북학의>, 유득공의 <발해고>, 그리고 이덕무의 아들에 의해 정리되어 세상에 나온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정조의 명에 따라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에 의해 만들어진 <무예도보통지>까지...

특히 <무예도보통지>는 무예 동작 기법을 세세하게 그림으로 그려 넣음으로써 글을 모르는 병사들까지도 쉽게 따라 배울 수 있게 만든 이론과 실제가 겸비된 최초의 군사 훈련서이기도 하죠.

이렇게 세상 속으로 나온 이들은 더 큰 미래의 조선을 생각하며,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어질 더 나은 세계를 위하여 일생을 공헌하고 헌신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업적들의 근본은 어릴 때부터 시작된 방대한 깊이의 책읽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가 책을 통해 나눴던 옛사람들과의 깊은 시간의 공유를 이제 저는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흔적은 사람의 기억과 마음속에 남는다고 합니다. 그 흔적은 그렇게 서로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시간 속에 길을 내기도 하고, 각자의 시간을 서로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네요.

시간을 나눈다는 것,

그것은 반드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책을 통해 우리는 옛사람들의 시간을 나누어 받을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우리의 시간을 옛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다고 이덕무는 말합니다. 그들의 소망이 나를 통해 이루어질 때 옛사람들은 그만큼의 사간을 더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어설픈 저의 책읽기 또한 옛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간서치 이덕무의 말처럼 어쩌면 저 역시도 조금은 이덕무의 벗이 되었다 감히 말할 수 있을지도요.

“......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와 나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시간을 나눌 수 있다. 옛사람과 우리가, 우리와 먼 훗날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 나누며 이어지는 시간들 속에서 함께 하는 벗이 되리라 ......”


* 책을 읽으면서 중간중간 나오는 모퉁이 그림들이 너무 예뻐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다정하고 소담스러운 그 단정한 그림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요.

이 책, 아무래도 오래오래 그리고 깊게깊게 사랑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덕무의 단정한 마음을 빌어 그가 밝힌 책읽기의 이로움을 옮겨 봅니다.

1.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2.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3.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되면서 천만 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4.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나의 책읽기는 나에게 어떤 이로움을 주는지...

오래오래, 깊게깊게 생각하게 합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10. 8. 06:08
 <개밥바리기별> - 황석영


개밥바라기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기록...

더 이상 절망적일 수 없을 것 같고, 더 이상 세상이 무의미해질 수도 없는 시기,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좌절, 끝냄에 대한 무한한 동경...

사춘기를 지나 어른도 아이도 아닌 중간자적 시기의 애매함이 주는 결정되지 않는 미래의 불안감, 그리고 추락보다 더 깊을 미지의 시간들에 대한 두려움...

딱히 결론내지 않아도 이야기의 결말을 말할 수 있는 모호함이 주는 신비.

“성장소설”은 이 모든 것들이 녹아있어 마치 반은 도가니처럼 펄펄 끓고 있는데도 나머지 절반은 절대로 녹는다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결빙처럼 차갑기만 합니다.

이런 모순의 결합이 책 속에 나오면 이상하게도 제겐 과학보다 그 내용들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우리의 시간은 기대, 관심, 기억 이 세 가지 순간의 연속이라고 하네요.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고요. 만약에 우리가 미래를 지향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과거를 읽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간이라......

어쨌든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고, 그런 이유로 나 자신이 바로 시간,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인가 봅니다.

가끔 생각해봅니다.

왜 작가들은 “성장소설”을 꿈꾸는가...하고요.

예전 같았으면 명랑만화나 청소년 권장도서쯤으로 생각했을 성장소설이 지금은 참 더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일체감이 주는 공감의 형성에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그건 시대가 주는 공감이 아니라 정서가 주는 공감, 달리 말하면 이심전심의 공감이라고 할까요?

다행히 우리 세대는 전쟁도, 그리고 군부독재니, 부정선거니 하는 시국에 대한 대대적인 군중 봉기도 겪지 않아 흐린 시대가 주는 어려움과 울분에 대한 분노가 부족할 수 도 있습니다.(그렇다고 효순, 미선 사건이이나 촛불집회 같은 것들을 과소평가하는 건 절대로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이 책,

<개밥바라기별>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방황과 헤맴은 이유가 있고, 그 떠돔 또한 정착하고자 하는 열망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차마 문을 못 잠그고 잠을 자는 어미의 마음...

청춘을 이겨내야 참 어른이 된다면, 그 청춘을 이길 수 있는 궁극적인 힘이 바로 고요한 머뭄을 제공하는 어미의 마음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모든 여자들은 꿈꿉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전 개인적으로 여자의 성장소설은 내가 남자였다면... 하는 그 불가능의 바람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남자의 성장소설은 내가 어미였다면... 하는 결론으로 종착되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축이 여러 가지 이야기와 생각거리를 만들어 서로 얽히게 되는 거죠.


<개밥바리기별>은 작가 황석영의 자전적인 성장소설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작가들 중에서 이 사람처럼 파란만장했던 사람도 흔치 않을 거라 생각되네요.

방북사건으로 제 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몇 년을 헤맸던 사람.

1993년 귀국했지만 5년간의 수감생활을 해야 했던 사람.

그리고 그 이후에 그야말로 미친 듯이 써내려간 엄청난 분량의 책들...

발표한 글의 양만큼 질적으로도 진화되어 가는 그의 글쓰기가 한때 심한 질투심으로 다가오기도 했더랬죠.

그래, 당신 참 대단하다. (더 솔직한 표현은 당신 참 잘났다...는 마음)

뭐 유치한 감정의 폭발도 살짝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이 책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5개월간 연재했던 소설을 다시 손봐서 8월에 출판됐습니다. 작가는 “지난 몇 달간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광장에서 이들과 소통하면서 글을 쓸 수 있었던 점은 행운"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글쓰기가 원고지나 컴퓨터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작업의 차원을 넘어섰다는 의미겠죠. 그 즉각적인 반응들이 65세 작가 황석영의 눈엔 참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의 반짝거리는 눈을 상상하니, 마치 그 눈이 “개밥바리기별(=샛별=금성=나그네별)”처럼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네요.

이 책은 참, 똑똑한 책입니다.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우리보다 똑똑한 지성이며 동시에 이유 있는 행동가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작가들은 과연 이런 대사들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할 만큼요.

작가 황석영은 억압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말합니다.

“억압이라는 것도 하나의 공감대에서 출발한다”고요.

그야말로 개인적인 체험에서 나온 말이죠.

그는 억압이라는 압박의 요소를 판소리의 추임새처럼 만들어 오히려 격려와 신명의 장단으로 바꿔버리는 그런 작가였던 겁니다.

어쩌면 대가라는 말조차도 무색한 그런 글쟁이죠.

 

"먼 길을 돌아 문예반으로 돌아온 느낌이 든다"

책을 출판하고 그가 한 말입니다.

그 신선한 발언이 17권 째의 장편을 발표한 65살의 그를 마치 이제 막 등장한 팔팔한 청년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아~ 이 사람, 이제 다시 시작하려나 보다...

글을 쓴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제 팔자를 남에게 내주는 일이라네요.

어쩌면 작가란 유목민의 다른 이름인 것 같습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

그러나 전 좀 다르게 말하고 싶네요.

어느 곳을 가든 정착하고 뿌리내리고 마는 질긴 생명력을 소유한 유목민이라고..,

세상 어느 유목민보다 간단한 생사도구를 꾸리고 이 길을 내 길로 바꿔 그대로 삶을 진행해가는 사람들...

그건 자유롭게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 어느 곳을 가든 책임감 있게 살겠다는 치열함의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황석영의 말을 빌려 말하고 싶네요.

"너의 모든 것을 긍정하라"고...


* 책보다는 작가 황석영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의 글이 되어 버린 셈이네요.

변명을 하자면, 이분의 책은 누구를 통해 만나는 것보다는 직접 읽음으로 해서 만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에...

그의 글들을 읽으면 잊어버린 세대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동시에 치열함을 잃은 자신에 대한 반성도 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다른 형태의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혹 모르겠습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