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1. 3. 21. 06:08
약간의 공통점이 있는 두 권의 일본 소설을 읽다.
두 권 다 여류 작가에 의해 쓰여졌다는 거.
역시나 일본소설답게 아무렇지 않게(?) 불륜이 등장한다는 거.
그리고 불륜이 나오니 더불어 성적인 요소가 다분하다는 거,
하나는 조금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그리고 하나는 아주 노골적이고 집요하게.
사실 일본 소설을 읽는 건,
때론 참 불편하고 헛헛하다.
다른 감수성과 다른 세계와 다른 촉각의 이야기들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있게(?) 지치지도 않고 이어질 때는
묘욕감 비슷한 불쾌감도 든다.


<초초난난>
표지에도 있듯이 남녀가 정겹게 속삭이는 모습이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남녀가 불륜이라는데 있다.
소설 속에는 다행히(?) 그 둘의 비밀스런 관계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함께 먹는 음식이나 일본 전통 기모노에 대한 이야기가 부각돼서 나온다.
(이런 부분들은 신선함마저 느껴진다. 
 일본이란 나라... 같은 동양권이지만 음식과 옷에 관한한 유럽이나 미국보다 더 이국적인 것 같다.)
음식과 옷이라...
아주 친밀한 사람과 함께라야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게 이 두 가지인 것 같다.
생각해보라,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과 혁대를 풀어놓고 본능적으로 아구아구 먹을 수 있는지...
(이상하게도 요즘 참 음식과 관련된 책, 공연 연달아 접하게 된다)
작가 오가와 이토는 전작 <달팽이 식당>에서도 음식과 관련된 소설을 썼던 모양이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소재로 찾은 셈.
식욕과 성욕, 그리고 장식적인 기능의 옷에 대한 욕망.
아주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을 그래도 눈살 찌푸리지 않게 수위조절(?)을 하면서 쓴 것 같다.
봄날 몽롱한 아지랑이 같은 나른함을 안기는 소설 ^^
몇몇 묘사나 표현들은 선명하고 차분했다.


"double fantasy"는 원래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1980년에 발표한 타이틀 곡이다.
남녀가 아무리 서로 사랑해도 서로 전혀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음을 뜻하는...
왜 이 노래 제목을 사용했는지 솔직히 지금도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성욕을 통한 창작욕의 점화?
차라리 대놓고 포르노그라피 소설이라고 했으면 정직하지 않았을까?
드라마 작가인 주인공 여자의 남성편력에 넌덜머리가 났다.
왕성한 성욕은 고유한 생명력의 발로고 
그 생명력은 창작에 대한 욕구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고 책의 인물 중 한 명이 말한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관능도 뭣도 아니다.
관능적이기엔 너무 파렴치하고 중심이 없다.
차라리 철저한 쾌락과 탐닉, 아니면 관음의 미학이라도 펼치던지...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부부에게 내가 다 미안해진다.
글을 쓴 무라야마 유카는 과거에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가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가 썼던 소설과는 완전히 180도 다른 소설이라고.
이 소설이 그녀의 다음 작품에 어떤 창작열의 원천으로 작용할지는 잘 모르겠다.
작가가 만족했다면 뭐 할 말 없지만...
일본 작품은 너무 극과 극을 달려서 싫다.
<더블 판타지>에 비교하면 <초초난난>은 아예 초등용 문고라고 할 수 있겠다.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인간으로 태어나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가 "불륜"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만 파괴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쌍방의 부부와 그 자식들까지도 파괴하는 짓이니까...
그래서 불륜의 책들이 나는 참 싫다.
이런 책을 만날 때면,
일단 손에 잡은 건 끝까지 읽어야 하는 결벽증같은 성질머리가 참 맘에 안 든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3. 20. 06:09
일본 소설 두 권을 읽다.
한 권은 성장소설, 그리고 한 권은 추리소설.
요시다 슈이치의 <요노스케 이야기>
18살 요노스케가 대학생활을 하기 위해 도쿄에 홀로 올라온다.
이야기는 엽기적이지도 않고 그저 평범한 한 청년의 이야기다.
뜻하지 않게 삼바 동아리를 가입하고
뜻하지 않게 부자집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고
뜻하지 않게 무언가에 휘말리게 되는 우리의 일상과 비슷하다.
요시다 슈이치의 <페러이드>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에 손에 잡았다.
일본의 성장소설은 성적이고 가벼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잔잔하고 평범하다.
세상 누군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그런 평범함.
그러나 그 안에도 특별함은 있다.



예전에 이 책이 처음 출판됐을 때
마치 이수현을 주인공으로 쓴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었는데
실제로 읽어보니 이수현 사건은 하나의 포인트다.
이수현과 요노스케가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고 사망하게 되는 사건.
(책의 의도는 정상적이었는데, 우리나라 출판사의 홍보는 다분히 비정상적인 형태였던 것 같다.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었노라 말하고 싶다.)
이 책의 의도는 그러니까
누군가의 삶이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바꿔놓는다는 사실이다.
보트 피블을 직접 목격하고 난민캠프의 일을 하게 되는 사람.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생활인으로 뛰어든 젊은 부부,
고급 파티걸이엇다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사람,
그리고 요노스케 본인까지도...
살아간다는 건, 성장한다는 건 늘 그랬던 것 같다.
평범하지만 그래도 작은 진실을 품고 있는 책이다.



야마구치 마사야가 1989년에 쓴 추리소설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
(며칠 전에 블로그에 올렸었는데 그만 실수로 삭제해버렸다.
 꽤나 인상깊게 읽은 책이라 나름 수다를 좀 떨었었는데... 무지 아깝다.
 다시 쓰려니 어쩐지 김빠진 맥주를 들여다 보듯 난감하다)
20년도 더 된 소설인데 그 참신함과 기발한 상상력이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책의 제목은 은유적인 의미로 쓰인 게 아니다.
실제로 이 책의 주인공들은 다들 버젓히 죽었던 시체들이다.
거기다가 방부처리까지 한 순도 100% 시체들이다.
쉽게 "좀비"를 떠올리면 된다.
(시신의 방부처리 작업를  "앰바밍"라 하고, 그걸 하는 사람을 "앰바머"라 부른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되다)
황당한 소설이라고 생각되는가?
그러나 읽고 있으면 더이상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작가 아바구치 마사야는
일본 본격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참신한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는데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단지 이 한 권만으로도 충분히...  )



Memento Mori!
"영원"을 꿈꾸는 인간에게 주는 경고의 말,
"Remember, You must die!"
소설 속에서 허스 박사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읽는 이에게 경고장을 전달한다.
" ...... 삶과 죽음은 표리일체(表裏一體), 삶을 생각하는 일은 죽음을 생각하는 일,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삶을 생각하는 일, 우리도 다들 살아 있는 시체라네. 되살아난 신체들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게댜. 삶과 현세에 아무리 집착한들 언젠가는 이렇게 티끌이 디고 만다고 말일세. 이게 바로 20세기의 '메멘토 모리' 아니겠나. 우리 모두 집행유예 중인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네......"
그리고 시체는 말한다.
"그저 '죽음'을 알기 위해 다시 살아온 듯한 기묘하고도 짧은 생애였구나!"라고...



인간은 불사의 영원한 생명을 잃은 대신 각각의 개별성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 개별성은 성(性)을 통해 그 생명을 분열, 증식한다.
그러니까 성(性)의 대가가 바로 죽음이라는 뜻이다.
"에로스와 데스는 형제"
죽은 시체와 살아있는 여자가 끌고 다니던  분홍색 영구차에 적혀있던 이 문구는
그러니까 참 정당하고 의미심장한 조합인 셈이다.
추리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장례의식에 대한 역사와 차이,
최후의 심판날에 죽은 자도 다시 살아 하늘로 들림을 받으리라는 기독교적 맹신.
죽어서도 재화에 집착하는 시체의 모습들까지
하나하나 전부 인간의 이면에 대한 보고서같다.
책을 읽는 동안 시체들이 너무나 인간적이라 심난했다.
좀비 세계에서의 고민도 행위들도
참 인간들만큼이나 이기적이고 치열하다.
괸해 내 옆의 사람을 한 번 쳐다보게 된다.
저 사람이 인간일까? 시체일까? (^^)

* 악마가 죽어가는 사람에게 거는 다섯 가지 유혹의 덫 (책에 나오는 내용)
 ① 신앙에 대한 의심
 ② 자신의 조에 대한 절망
 ③ 이승의 재화에 대한 집착
 ④ 영혼의 구원에 대한 회의
 ⑤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보는 교만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