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 끄적끄적2013. 11. 26. 07:59

술탄 아흐멧에서 트램을 타고 에미노뉴에 하차하면

"보스포러스 투어" 외치며 열심히 호객하는 현지인들이 정말 많다.

옷소매를 잡아끄는 현지인들에게 과감한 "No!'를 연발하며

2년 전에 탔던 트리욜 크루즈를 찾아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아서

가까운 곳에 정박해 있는, 금방 출발할거라는 크루즈에 그냥 탑승했다.

(사실은 트루욜을 못 찾았다...ㅋㅋ 에미뇌뉴 항구... 너무 넓다...)

어른과 어린이 구분없이 1인당 10리라.

페리를 타고 아시아 지역으로 넘어가 둘러볼까도 생각했는데

솔직히 조카들을 데리고 모르는 곳을 간다는 게 엄두가 안나서 그냥 크루즈를 타기로 했다.

비록 수박 겉햩기에 불과하겠지만

크루즈를 타고 아시아 지역과 유럽지역을 훝어보는 것 확실히 색다른 경험이다.

우리나라의 한강 유람선과 비슷할거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착각! 

물 위를 배를 타고 간다는 건 같긴 하지만 밋밋함과 입체감의 차이랄까?

한강은 솔직히 보스포러스 해협같은 운치와 경관은 기대할 수 없다.

남겨진 게, 보여줄 게 참 없구나 생각하니 좀 샘이 나기도 하더라.

 

해협을 따라 흘러가면서 만나게 되는 이색적인 건물들.

거대한 돌마바흐체 궁정의 외관에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궁전을 개조한 최고급 호텔 츠라얀 팔라스 호텔은 꼭 미니미 돌마바흐체 같았다.

(이곳에 고 노무현 대통령도 묵었다던데...)

무스타파 케말이 졸업한 사관학교의 뽀쪽한 외형을 보면서는

지키려는 자의 날카로운 칼끝을 생각했고

루멜리 히사르와 반대편에 위치한 아나톨로 히사르를 지나면서는

좁디 좁은 이곳 병목지역에서 숱하게 죽어간 선량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땅을, 바다를, 하늘을 잃는 것만이 폐허는 아니다.

사람을 잃는 건.

그게 가장 큰 상처고, 폐허가 아닐까!

황제의 여름 별장 베일레르메이 궁전은

너무 앙징맞게 예뻐서 마치 인형의 집을 보는 것 같았고

크루클래시탑은 또 다시 전설을 떠올리게 했다.

(공주, 생일, 마법사의 저주, 20살 생일, 과일 바구니 안에 숨어있던 독사. 저주의 실현.. 기타등등... 기타등등...)

꼭 보고 싶었던 오르타쾨이 자미는 대대적인 보수중이라 겉모습조차도 보지 못했다.

오르타괴이의 유명한 감자요리 쿰피르도 잠깐 생각했고...

결국 다음날 루멜리 히사르에서 숙소로 돌아가다 일부러 오르타쾨이에 내려서 쿰피르 골목을 찾아갔다.

(맛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토핑을 잘 골랐어야 했는데 mix로 했더니 맛이 좀 강하더다.)

 

보스포러스 투어는 아마도 이스탄불을 갈 때마다 매번 찾게 될 것 같다.

특별할 것 없는 것 같은데 늘 특별했다.

바람과 햇빛 속에서 어쩐지 말갛게 행궈지는 느낌이라서...

그리고 꼭 기억하자!

배의 오른편에 앉아야 view가 더 좋다는 걸.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스탄불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음번엔 꼭 해저물녁에 보스포러스 크루즈를 타리라.

그럼 물빛과 하늘빛이 만나는 보스포러스를 목격하게 되지 않을까!

됐다!

이걸로 다시 돌아갈 이유...

충분해졌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1. 10. 18. 05:31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그랜드 바자르와 이집션 바자르를 들러본 후
이집션 바자르에서 가까운 자미 몇 군데를 보고
트램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서 그랜드 바자르까지 걷기로 했다.
가는 길에 국제공중전화 카드도 샀다.
그러나 몇 번의 도전 끝에 결국 give up을 선언했다.
(카드는 결국 그대로 한국까지 친히 따라왔다. 지금도 가끔 공중전화 카드 쳐다보면서 혼자 웃는다.)
터키 현지인들이 여러번 도와줬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매번 못 걸던지...
도저히 미안해서 나중에 하겠다고 하고 도망쳤다.
이렇게 심한 길치에 엄청난 기계치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무사히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음을 감사하면서...



술탄아흐멧에서 트램을 타고 이동한 곳은 이집션 바자르(Misir Carsi).
입구가 시장처럼 보이지 않아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뻔 했다.
열심히 헤매다 바로 앞에서 또 현지인에게 물어봤다.
정말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서...
그랜드 바자르보다 규모는 작지만 보다 서민적이이라 오히려 정겨운 느낌이다.
이집션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옛날 이집트에서 온 물품의 집산지가 이곳이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이곳은 과거에 실크로드를 따라 동방에서 온 향신료가 주로 거래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 역사가 고스란이 남겨져 여전히 향신료 시장이 유명하다.
그래서 스파이스 바자르(Spice Bazar)라고 불리기도.
예전에는 향신료만 전문적으로 파는 상점만도 무려 100여 개가 넘었다는데
지금은 몇몇 가게만이 명백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향신료 말고도 견과류, 씨앗, 꿀 등 주로 먹거리와 관련된 품목들이 많았다.
특히 이곳에서 파는 파스차티오는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단다.
향신료나 파스타치오를 못 사서 아쉬웠지만
기념품으로 선물할 악마의 눈 열쇠고리와 악세사리, 올리브 비누를 샀다.
그리고 애플티도!
가끔 여행사진 보면서 애플티 마시면 정말 당장이라고 날아가고 싶을 만큼 그립다.



구시가지에 위치한 터키 최대의 재래시장인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r)!
1461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조성됐다니 그 역사만도 엄청나다..
(술탄 메흐메트 2세란 인물, 터키 이곳 저곳에 참 많은 역사와 건물들를 남긴것 같다.)
터키어로는 '카팔르 차르쉬(Kapali Carsi)'로 '지붕이 있는 시장'이란 뜻이란다.
이곳은 유럽과 아시아의 온갖 물산이 넘나들던 교역의 메카였다.
이곳을 통해 유럽의 부가 아시아에 전해졌고
실크로드를 따라온 아시아의 물품 역시 그랜드 바자르를 통해 유럽으로 흘러들어갔다.
지금까지 12번의 지진과 9번의 화재를 겪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더 큰 규모로 복구돼서 지금과 같은 어마어마한 도시같은 시장이 됐다.
남쪽은 베야즛, 서쪽은 이스탄불 대학교, 동쪽은 술탄아흐메트와 접해 있는데
한 번 들어가면 같은 출입구로 나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출입구만도 20개가 넘는단다.
그래서 일단 기준이 되는 통로를 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이동하는게 그나마 덜 헤맨다고...
확실히 이집션 바자르보다 물량도 엄청났고, 품목도 엄청났고, 사람도 엄청나서 조금 몽롱했다.
미로같은 길을 걷는 것도 보통이 아니고...
귀금속부터 카펫, 가죽, 도자기, 옷감, 골동품 상점,
그리고 매나아샾같은 장난감 자동차 가계까지.
이곳을 제대로 보려면 하루 온종일이 걸려도 모자라겠다 싶다. 
그래도 역시 시장은 시장이다!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 두 분이 장기(?) 같은 걸 두시는 모습은 우리네 풍경이랑 똑같다.
(두 분은 물담배 내기를 하셨을까? 아니면 차이 한 잔? ^^)
그렇게 서로 비슷하게 통하고 연결되는 게 사람 사는 모습인지도 모르겟다.
먹고 사는 생존의 분주함과 노력이
문득 거룩하고 신성한 종교처럼 다가온다.
아! 밥벌이의 위대함이여!

Posted by Book끄-Book끄
여행후 끄적끄적2011. 10. 6. 05:16
파쿡칼레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10시간을 다려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셀축, 에페스를 못 본 건 정말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다)
여행자숙소 야카모즈에 하룻밤 자고 아침을 먹자마자 찾아간 곳은 돌마바흐체 궁전.
술탄아흐멧에서 트램을 타고 종점 카바타쉬에 내려서 걸어갔다.
이곳은 오스만 왕조 시대의 술탄의 마지막 거성으로
터키 국민의 영웅 아타튀르크 대동령이 관저로 사용했던 곳이다.
"돌마바흐체"라는 말은 "가득찬 정원"이라는 뜻이라는데
이곳이 바다를 메워서 세웠기 때문이란다.



정말 소문대로 줄이 길었는데
티켓 구입하는데도 거의 40~50분 정도 기다린 것 같다.
(아마도 토요일이라 더 그랬는지도... 근데 터키도 주 5일제 근무인가???)
다행히 기다리면서 여러가지 볼거리들이 있어서 그다지 지루하진 않았다.
궁전 정문 앞에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위병은 정말 마네킹같았다.
심지어 다른 위병이 땀을 꼼꼼히 닦아주는데도 전혀 움직임이 없더다.
절도있는 위병교대식도 인상적이었고
거대한 입구 상단의 조각들도 너무 아름다웠다.
궁전 입구에 있는 유명한 시계탑은 1890년 술탄 암뒬 하미드 2세가 세운 것으로 높이가 27m나 된단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시계는 프랑스 폴 가르너의 시계고
첨탑에는 오스만 제국 왕실의 문장이 새겨져있다.
(근데 어떤건지는 잘 모르겠다. ㅋㅋ)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따라서 만들었으면 돌마바흐체 궁전은 처음엔 목조건물이었단다.
1843년부터 10년동안 보수 공사를 통해 현재와 같은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 탈바꿈됐다고.
방이 무려 285개나 있고, 거실도 43개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에 그저 놀라울 뿐.
게다가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 쭉 펼쳐져 있어 주변 경관도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궁전은 남자만 들어갈 수 있는 Selamlik와 금남의 집 Harem으로 나눠져있다.
개인관람은 불가능하고 입구에 적인 관람 시간을 보고
영어, 터키어 중 선택해서 그룹투어만 가능하다.
(물론 내부 사진촬영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프랑스식 정원을 만나게 되며 웅장한 정문을 통과해 내부로 들어간다.



내부장식이 화려하기로 유명한 돌마바흐체 궁전은
600여점이 넘는 유럽의 명화로 벽이 장식되어 있다는데 그 그림을 보는 재미도 대단했다.
(그림에 친절한 설명이 되어 있었면 더 좋았을텐데...
 다 명화라는데 이름이나 제목이 적혀있지 않는 작품이 너무 많았다.)
대리석과 가구들, 양탄자, 상들리에의 화려함은 두말할 것도 없고.
특히 셀람륵 부분 마지막 관람지인 그랜드 홀에 있는 상들리에가 가장 유명한데.
36m 천장에 달려 있는 이 상들리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로 줬단다.
그 무게만도 무려 4.5 톤!
그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줄도 참 대단하다.
샹들리에 바로 아래에서 보고 싶었는데  관람줄 안에서만 봐야해서 좀 속상했다.
각국의 귀빈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는 나름대로 그 나라에 맞게 인태리어가 되어 있었다.
삐걱이는 복도를 따라 비닐을 신고 걸어가는 단체로 바스락 거리며 걸어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창과 햇빛을 가리기 위해 만든 블라인드 사이로 비치는 햇빛 색도 예뼜고...



하렘은 톱카프 궁전보다는 훨씬 덜 답답하고 소박하지만 확실히 현대적인 느낌은 더 강하다.
입구에 터키어 관람 시간만 적혀 있어 영어해설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다행히 영어 가이드였다.
(누가 장난으로 지웠나???)
은은한 분홍빛을 띠는 하렘 외부 모습은 소박하고 따뜻한 여인의 느낌이었다.
돌마바흐체 매표소에서 티켓을 구입할 때 카를륵과 하렘을 같이 보는 티켓(10TL)으로 구입한 사람은
이곳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티켓 재확인 하더라)
하렘이 보기 싫으면 카를륵만 봐도 이상무!
하렘을 나오면 그냥 가지 말고 시계 박물관과 크리스탈 박물관도 빼놓지 말고 둘러보자.
크리스탈 박물관은 조금 실망스럽지만 시계 박물관은
세계 각국에서 선물로 보낸 것들을 모아놓은 것 같은데 상당히 볼만하다.
must have 하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돌마바흐체 주변의 보스포러스 해협과 함께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을 잡아끈다.
참 아름다운 곳에 터를 잡았구나!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던 곳!
터키의 영웅인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는 이 아름다운 궁전에서 집무 중에 사망했단다.
그래서 그를 기리기 위해 궁전 안의 모든 시계는 그가 사망한 9시 5분에 고정되어 있다고.
문득 씀쓸해진다.
우리나라도 대통령과 관련된 이런 기록이 언젠가는 생기게 될까?
터키 국민의 아타튀르크 대통령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보면서
MB 공화국 시민은 그저 부럽고 부러워을 뿐!
어쨌든 이것 또한 다 지나가리라~~
그러니 이제 조금만 참자!
(어쩌다 이렇게 옆길로 샜을까???)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5. 20. 09:17
"메르하바~~~"
(안녕하세요?)
잠깐이었지만 터키를 다녀왔다.
이 책을 나는 이렇게 시작하고 싶다.



이스탄불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횡단하는 페리를 타고
다시 돌무쉬와 트램을 몇 번씩 갈아타면서
나는 하렘를 들러보면서 터키 황실의 화려한 과거를 그려보리라.
"스타워즈"의 촬영지였다는 카파도키아를 들러
지하 도시를 길을 잃어도 오래오래 깊게깊게 다녀보리라.
조용한 호숫가 마을 에이르디르에서는
떠나고 싶을 때까지 마냥 기다림처럼 앉아 있을 것이고.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절을 하고 기도하도록 알리는 "아잔" 소리에 낯설어 하면서
걸음을 멈춰 볼 것이고,
용기를 내서 "Tree House"에도 올라가보리라.
지중해 고대 도시 올림포스에서는
코발트빛 지중해를 눈이 시리도록 내내 찬란하게 바라보리라.
그리고나면 나는 다시 돌아오고 싶어질까?
어쩌면... 아닐지도...




여행작가 오소희.
1971년생인 그녀는 이제 고작 3살이 된 아들 중빈(JB)과 함께
터키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1.5인의 함께 하는 여행.
그리고 그녀는 분명 아들을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함께 여행을 했다.
터...키...
내가 늘 꿈꾸는 유토피아의 세계.
언젠가 내가 말없이 훌쩍 사라져버린다면
나는 분명 터키에 있을 것이다.
이스탄불의 블루모나코와 성소피아 성당 앞에서
신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것이고
올림포스의 지중해 태양아래 펼쳐진 푸른 물 속에서
말갛게 나를 행궈내고 있을 것이다.
터키... 터키... 터키...
나를 터뜨릴 것 같은 이 나라가 나는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버겁고 그립고
끔찍하게 보고싶다.






이 책은 내게 너무마 치명적으로 절망을 안긴 책이다.
터키... 미치도록 가고 싶은 나라.
아니 미쳐서라도
꼭 가고 싶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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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낯선 이에게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행지에서조차 불필요한 시선이나 말과 미소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키우는 동안 변했던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고마움을 배운다"는 것과 동의어다. 그들이 내 아이를 향해 웃었기 때문에 나 또한 그들에게 고마운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 그들은 어김없이 두 배로 화사한 미소를 다시 내게 돌려준다.
이제는 누가 머저 미소를 짓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나는 이곳에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인사를 한다. 그리고 오느새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많은 터키인들 사이에서 손짓 발짓 섞어가며 대화를 하고 있다. 아루런 계산도 긴장도 없이 새로운 사람과 관계 맺기를 즐기는 것. 아무래도 내가 아이를 데려온 게 아니라, 아이가 날 이곳에 데려온 것만 같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이 험한 노동에 늙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거나 나무껍질 같은 손을 지니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내가 가끔씩 거울 속에서 찾아내는 나이듦의 징후들은 이들의 "진짜" 주름에 비하며, 한없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카파도키아"란 중부 아나톨리아 고원 일대를 아우르는 명칭이다. 몇 차례에 걸친 화산 활동으로 이 일대가 잿빛 응회암으로 뒤덮였고, 이중 일부는 풍화 작용을 거쳐 기괴한 모양을 만들었다. 영화 "스타워즈"의 촬영 장소였다고 하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되리라.
그러나 이 자연 비경만으로 관광객들이 들끊는 것은 아니다. 이곳은 로마 시대에 탄압을 피해 숨어든 기독교인들의 주거광간이 되기도 했던 지하 도시와 동굴집으로도 유명하여, 역사적 종교적 유적을 확인코자 하는 이들의 발길 또한 끊이지 않는다.

내가 10대였을 때는, 누군가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내가 하기 어려운 일을 앞장서 해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 불과했다. 내가 20대였을 때, 타인에게 봉사하는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자신의 삶을 성실히 영위하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30대인 내게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며,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자신의 삶을 성실히 꾸려나가는 것에도 부단한 노력과 결심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한 노력과 결심이 조용한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다.

예전에 나는 낯선 사람과 그렇게 "즉각적으로 공통의" 화제를 찾아 환하게 미소를 터뜨려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쉽게 열리고 나눠본 적이 없는 삶이었다.
그럿은 또 내가 어떻게 자랐는가를, 얼마나 많은 미소와 따스한 손길과 보살핌 속에 성장하여 오늘날 이렇게 존재하게 된 것인가를 감사히 반추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전에 내가 반추했던 것들이 상처와 얼룩에 대한 기억이었다면, 이후에 나는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면서 내가 받은 사랑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비로소 화해와 치유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관계의 많은 부분은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자신이 희생하는 것들과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데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그 "무엇가"를 위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좋아하는 것을 위해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얻을 수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들의 오해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그 "무엇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희생하지도 않는 것이다.

아이가 해낼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모의 무지이자 욕심이다. 그러나 아이가 해낼 수 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부모의 무능력이다.

아들아, 세상에는 유희가 생략된 유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도 있단다. 따스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단다. 네게는 세 살부터 시작된 이런 여행이, 한평생을 다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사치가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딴다. 나는 네가 그런 사람들을 부단히 많이 보아서, 끝없는 속도전에서 비롯되는 초조와 이기심으로 차갑게 마음이 식어버렸을 때마다 스스로 발광하는 태양처럼, 스스로 네 마음을 뜨뜻하게 덥힐 수 있기를 바란다. 가진 것을 느끼고, 가진 것에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부터 나누고, 함께함으로써 더 많이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게 융숭 깊은 사람으로 자라주렴.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