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1. 2. 24. 06:39
법학을 전공한 법대 교수,
그리고 실제로 헌법재판소 재판관이기도 한 베른하르트 슐링크.
소설을 쓰는 사법인이라...
이 사람의 책을 전부 3권 읽으면서도 난 이 조합이 여간해선 잘 믿기지 않는다.
선입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섬세한 감성을 가진 문학적인 판사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니...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귀향> <다른 남자>
세 권의 책은 경이로울만큼 아름답고 집요하고 끈질긴 이야이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내 속에 남아 계속 살아있는 그런 이야기.
장편이 주는 울림도 잊을 수 없었는데 6편의 단편이 주는 울림도 만만치 않다.
전후 독일, 그리고 죄와 책임에 대한 문학적 화두(話頭)
어쩌면 그가 독일인이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남과 북, 동과 서로의 분리.
독일과 우리의 역사적 테제는 그렇게 문학적 테제가 되어 원죄처럼 남아있다.
독일은 과거란 시점으로, 그리고 우리는 아직 현재진행형의 시점으로...



소녀와 도마뱀
외도
다른 남자
청완두
아들
주유소의 여인



6편의 단편 중 책의 타이틀인 <다른 남자>는
스트븐 달드리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처럼 영화화가 됐었다.
(200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케이트 윈슬렛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긴 바로 그 작품... 챙겨서 봐야 하는데... 쩝!)
리처드 이어 감독이 만든 영화 <다른 남자>는
2008년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 공식 개막작이기도 했단다.
책에 나오는 여섯 명의 다른 남자.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른 곳에서 이곳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살았고, 그리고 기억되는 남자.
그 모습을 목격하거나 혹은 뒤늦게 알게 된다면
가장 가까이 있었던, 가령 부인이나 남편은 그 뜻밖의 사실을 알고 어떻게 할까?
의외로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담담해서 처연하다.
인간의 추한 이면과의 대면의 까발림을 기대했다면...
글쎄...
내겐 이 여섯 명의 다른 남자들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하고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일부러 꾸민 모습을 전부로 아는 누군가가 저쪽에 있다는 건,
어찌됐든 살아가는 데 또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진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어쩌면... 어쩌면...
나도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다른 세상을 원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그가 이번에도 나를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놨다.
그러니 이곳에서 잠시...
살아봐야겠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1. 2. 23. 05:47
김두식, 그가 쓴 <불편해도 괜찮아>를 읽었었다.
법조인이 쓴 인권 영화 이야기.
그 자체로도 내겐 쇼킹한 일이었는데
책을 읽고 나서는 더 쇼킹했다.
"야! 이 사람 정체가 뭐지?"
법을 전공한 사람이 이렇게 재미있으면서도 뼈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신비로웠다.
그래서 다른 책을 읽어보자 찾아봤고 그 선택이 <불멸의 신성가족>이다.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이 사람 이 책을 쓰고 법조관련인들에게 완전 블랙 리스트로 확실히 찍혔겠다 싶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만 해서...
우리나라 법조계만큼
인맥, 학연, 그리고 그로 인한 청탁이 잘 통하는 곳이 있을까?
도제관계의 연수는 소위 말하는 "연수원 몇기냐?"라는 질문앞에
당당하고 정당하려는 권위를 추락시키고 끌어내린다.
다른 사람이 아닌 사법 종사자 당사자의 입으로 말하는 법원과 검찰의 고질적인 불친절.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은 맞는데
어쩐지 뒷통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찜찜하고 서글프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타자성의 세계에 속할 수밖에 없는 사법계.
우리의 사법계의 시스템이라는 건,
약자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그 처절한 행동 자체를 불법으로 만들어버리단다.
약자가 권리를 침해받고 있을 때는 침묵하던 법이, 견디다 못해 약자가 그걸 세상에 알리고 바로잡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뒤늦게 개입하여 약자만을 처벌한다.
사회의 최고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의 의사소통 능력의 부재는
소 귀에 경읽기의 수준을 능가한다.
이런 로얄패밀리 정신은 조폭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먹고 죽자는 폭탄주 술문화 발전에 지대한 이바지를 한 곳이 사법부와 조폭, 이 두 곳이 아니던가!)
변호사가 돈을 버는 것은 판사들에게서 받는 모욕에 대한 댓가라지만
내 돈 내고 변호를 의로했음에도 모욕을 당하는 사람은 이 보다 훨씬 더 많고 모욕의 정도도 더 심하고 추하다.
판사를 하다 변호사로 개업하는 전관변호사는
"용돈"이라는 이름으로 후배 법권들에게 통 큰 선배 행새를 한단다.
그게 바로 "거절할 수 없는 돈"으로 법조계에서는 관행으로 이어져왔단다.
...... '거절할 수 없는 돈'은 판검사들이 변호사에게 용돈을 받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합리화 수단으로 오래도록 활용되었습니다. 나는 원치 않으나 '남들이 다 받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받는다'는 공동의 보호장막 아래에서 모두의 잘못이 면죄부를 받아온 셈입니다 ......
전직 판검사 출신 변호사인 전관 변호사가 현직 판검사 후배에게 주는 돈을 거절하면
오히려 평판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니 참 어이없는 세상이다.
거기다 전관 변호사의 은근한 청탁까지...
그래서 법조계 주변에서 나누는 우정은 보험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한단다.
...... 실력 있는 변호사보다는 청탁할 수 있는 변호사를 선호하는 경향, 그래서 판검사 출신, 장관 출신, 헌법재판관 출신이 아닌 사법연수원 출신 변호사는 결국 브로커를 통해서라도 사건을 수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변호사 수임료가 턱없이 비싼데는 브로커에 대한 소개비라는 보이지 않는 비용이 매우 큰 몫을 차지합니다. 그리서 큰 수임료를 받을 수 없는 변호사는 탈세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법시험 합격자들의 견고한 내면의 성벽을 깨기란
현재로선 거의 불가능하다고 저자는 솔직히 고백한다.
그러면서 법조계 문제점의 핵심으로 지적한 것이 다음의 두 가지다.
'의사소통의 부재'와 '원만함이라는 신성가족 이데올로기'
그래도 지금은 예전에 비해 법원과 검찰이 많이 깨끗해젔다고 하는데
평범한 우리가 보기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세상"일 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답답했다.
사법에 대해서 쥐뿔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옥죄어오는 갑갑함과 점점 숨을 조이고 들어오는 일방적인 권위의 위상!
참 어렵고 힘들구나.
우리나라 사법계의 로얄 패밀리 그 심장을 관통한다는 것은...
개천에서 용이 났다면 정말 장하고 대단한 일인데
어쩌자고 용들은 그 개천을 아주 싹 잊어버린다.
잊어버리기만 하면 그나마 다행일텐데 아예 부정까지 한다.
나는 애초부터 당신들과는 태생부터 다른 사람이라고...
개천은 이래저래 참 서글퍼지고 말았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0. 5. 26. 06:38
베른하르트 슐링크.
이 멋진 독일 작가의 글때문에 나는 오랫만에 충만했고 환상적으로 행복했다.
<더 리더 - 책읽어 주는 남자>를 읽으면서
전율에 가깝게 느꼈던 모든 감정들이
<귀향>을 읽으면서 또 다시 고스란히 찾아왔다.
그러나 그 느낌은 한 단계 위의 감정이었고 감동이었다.
법대 교수이자 판사이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베른하르트 슐링크.
(이런 조합이 믿어지는가? 소설을 쓰는 판사라는 조합이...)
1944년 7월 6일 독일 빌레펠트에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와 만하임에서 자랐다.
1981년 관공서 간의 공무 협조에 관해 쓴 교수 자격 논문이 통과되었고,
본, 프랑크푸르트 대학을 거쳐 현재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뉴욕 예시바 대학 객원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헌법 재판소 재판관도 겸임하고 있다.
그의 이력과 비슷한 이 책 <귀향>은 어쩌면 그 자신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단지 주인공이 판사가 아니라 출판사 일을 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
그의 글에는 시간과 아픔과 신비와 현실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읽고 있으면 소설이 아니라 너무나 분명하고 선명한 역사를 겪고 있는 느낌이다.
단 두 권 뿐이었는데도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뼈마다가 아리고 저렸다.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와 함께 독일에 거주하는 주인공 페터.
(모자 사이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일종의 "금기"였다)
그는 방학 때면 스위스에 거주하는 할아버지 댁에서 매년 시간을 보냈다.
<기쁨과 재미를 주는 소설> 총서를 편집하는 일을 하는 조부모는
잘못 인쇄된 종이들을 모아 손자에게 연습장으로 쓰라며 주곤 했다.
그러면서 당부한다.
뒷 장의 소설은 읽지 말라고...
금기가 허물어지는 순간 페터의 앞에 나타나는 카를의 귀향 이야기.
잠시 잊고 있다가 성인이 된 후 우연히 이삿짐에서 다시 보게 된 이야기의 배경이
어디선가 실제 보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종의 기시감이랄까?)
페터는 직접 결말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페터는 또 다른 금기였던 아버지의 행적까지 찾아 나서게 된다. 
"오디세이아 모티브"
탈출, 방랑, 귀향...
책 속에 등장한 모든 이야기는 오디세이아 모티브로 점철된다.
급기야는 페터 자신의 인생까지도...
결국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귀향"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던가!



잃어버린 소설의 결말 찾기와 부재하는 아버지 찾기.
전쟁과 전후 세대의 이야기.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
절묘한 신화의 모티브.
집을 떠나기 전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을 찾으라며 흔적을 남겼을까?
거울의 반쪽을 서로 맞춰보면서 부자 지간을 확인하고
신화 속 비범한 인물이 된 아들은 온갖 역경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결국 아버지를 만나 적자의 정통성을 인정받게 될까?
소설의 중간 중간 나오는 귀향 이야기들은
아름답고 신비하면서도 불안하고 불편하다.
그건 아마도 독일의 역사와 비슷하리라.
"루시퍼 이펙트"를 보는 듯한 세미나를 가장한 실험 장면은 섬득하다.
......대학원생들과  미래의 정치인, 판사, 사업가, 그리고 다른 유력가들은 극단적인 조건에서 어떤 행동을 보일까? 얼마큼 협력적이고, 얼마큼 이기적일까? 얼마나 원칙을 견지하고, 얼마나 적에게 동조할까? 서로를 배신하게 만들고 서로를 적으로 돌리는 데는 어떤 장치가 필요할까? 얼마큼의 추위와 굶주림, 압력, 공포가 있어야 문명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까? ......
역사와 정의의 문제, 악의 본질에 관한 예리하고 비열한 현실을
읽는 사람은 각오하고 똑똑히 목격해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또 다른 이야기들까지도...



페터는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해답은 혹은 결말은 여기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권하고 싶다.
꼭 읽어보고 느껴보라고...
가슴 속에 굵은 금이 생길만큼 이 책은 특별하다.
나는 지금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또 다른 책 <다른 남자>를 꿈꾸고 있다.
이 사람을 다 읽어내고 싶다.
그의 단편 <사랑의 도피>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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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랑하면서도 사랑받지 않을 수 있고, 그것을 불공정한 것으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응답받지 못한 사랑의 공정함도 있는 법이죠.

아버지에 대해 알고 나서부터 그래. 마치 아버지에게 터뜨리지 못한 분노가 다른 분출구를 찾아 헤매는 것 같아.... 그동안 난 항상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살아왔고, 설령 잠시 세상에 발을 담근다 해도 저항이 있으면 언제라도 후퇴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

악의 선한 면이란 악이 선을 위해 쓰일 수 있다는 겁니다.
가난과 고통이 진보와 문화를 가능케 하고, 폭력이 평화를 보장하고,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이 정의로운 혁명과 정의로운 전쟁을 성공으로 이끕니다.
나는 그가 이것을 일부러 연출하고 즐겼다고 확신했다. 그는 강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연구하고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려 했고, 더 나아가 학생들을 바꾸려고 했다. 어떻게 바꾸려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잘못하지도 않은 일로 사과해야 하는 자기비판의 모든 형식이 결국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이 붕괴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항상 진실과 거짓을 행하고 있다. 다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에 대한 결정은 개인이 내려야 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그리고 악이 자유롭게 떠돌아 다녀도 되는지 아니면 선을 위해 이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도 개인 소관이다. 이는 우리 개인이 올곧게 결정을 내린다는 것과는 다를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이유로 과거에는 남은 사람들에 대한 희생자의 값어치에 비례해서 살인을 처벌했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게 있어서 아들이나 딸의 값어치, 주인에게 노예의 값어치가 그것이다. 오랫동안 흑인을 살해한 백인이 백인을 살해한 흑인보다 경미한 처벌을 받은 것도 그래서이다. 살인자로서의 행위가 더 관대한 처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희생자의 가치가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종 청소의 경우는 별 양심의 가책 없이 편하게 살인을 저지를 때가 많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들을 아예 하나도 남겨 놓지 않기 때문이다. 인종 청소의 전제는 이렇다. 청소할 민족을 고립시키고, 그들을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이루는 세계의 질서 속으로 편입시키지 않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그들의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한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2. 4. 06:29
 "저 소년은 오직 너제트라는 말만 포옹합니다.
  저 놈의 말 대가리를 제가 뒤집어쓴 것 같습니다. 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연극 <에쿠우스>의 시작은 이렇다.

얼마나 가슴 떨리게 하고 얼마나 치열하게 바라봤던 연극인가...
내가 기억하는 <에쿠우스>는
"중독"과 "탐욕"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대학로 세번째 연극열전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으로 2009년 다시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많이 두근거렸고 그리고 첫사랑을 재회하는 것처럼 마냥 떨렸다.
송승환과 조재현의 다이사트.
젊은 시절 알런으로 무대 위에 올랐던 그들의 감회에
주책없이 동참하기까지 했다.
김태우와 류덕환, 그들의 알런이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했다.



2005년 김영민 알런에 남명렬 다이사트를 신화처럼 그리고 아직도 현실처럼 생생하고 기억하고 있는 나...
5년만에 보게 된 <에쿠우스>는
그러나 내겐 황무지를 바라보는 것처럼 피폐한 모습이었다.
코믹버전의 에쿠우스를 보면서 10분의 뜬금없는 인터미션에도 불구하고
지루함과 오랜 싸움을 해야만 했다.
조재현 연출의 <에쿠우스>는
그전까지 봤던 집요하고 끈질기고 그리고 실험적인 공연을
과감하게(?) 시장판으로 내돌리기로 결정한 듯 하다.
연극의 대중화를 위해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열극열전 시리즈는
아마도 조재현이라는 배우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으리라.
그래, 그건 정말 인정한다.
그리고 그의 노력과 열정에는 누가 뭐래도 기립박수를 보낸다.
물론 연극열전의 작품들이 전부 괜찮았던 건 아니지만,
어찌됐든 뮤지컬의 대중화에 밀려 침체기에 놓여 있던 연극의 유료관객 수를 엄청나게 늘려놨다는 건
내게도 대단한 이벤트요 혁신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그래도...
에쿠우스를 시장판으로 내돌린 그의 연출에
나는 너무도 너무도 화가 치민다.



송승환, 류덕환
스크린을 압도한 두 배우의 연기는
알몸에 가까운 근육질의 8마리 말들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파괴된다.
(2005년에 비해 말 한 마리가 늘었다. 5년 후에는 9마리의 말이 등장하게 되는 건 아닐까???)
"정열을 파괴할 순 있어도 창조할 순 없다"
다이사트의 말이 무색할 만큼 알런의 열정은 그 전에 이미 사라졌고
(그래도 이 연극에서 제일 눈에 띄는 사람이 바로 류덕환이다.
그의 표정과 말투에는 알런이 어쨌든 담겨있다. 행동은 모호했지만... )
다이사트는 마치 TV 브라운관을 통해 드라마를 시청하듯 알런을 향해 내내 심드렁한 모습이다.
(여차하면 체널을 돌릴 기세다)
공연 시작 전에 송승환 다이사트가 먼저 나와 혼자 보란듯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
뭐랄까, 소문 무성한 무당집에서 바람잡이가 순서표를 나줘주며 손님들을 떠보는 액션 같이 불쾌했다.
그래도 아버지에 비하면 다이사트의 불쾌감은 그나마 봐줄만 하다.
철저한 금욕주의의 알런의 아버지는
"개그콘서트"에 출연해도 단박에 인기를 끌 수 있을 만큼 잔인하게 코믹하다.
코믹한 금욕주의자라니...
때때로 아버지로 인해 웃어대는 관객들.
나는 그런 웃음을 이끌어내는 연극이 너무 못마땅하고 너저분하고 난잡하게 느껴졌다.
알런의 아버지는 결코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그의 금욕이 비록 겉모습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그런 이유로 더 철저히 냉소적인 비웃음을 안겨줬어야만 했다.
그래야 극의 후반부 포르노 영화장에서 아들을 마주치는 장면에서 이중적인 인간의 근본과의 대면을 보며
관객들 또한 스스로의 모습을 보는 듯 진저리를 쳐야 했다.
그러나 2009년 에쿠우스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발정난 인간에 불과했다.
그는 아마 꿈에서도 금욕을 생각하지도 못할 인물이다.
그렇다면 알런의 어머니는?
교사출신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는
과연 자신의 아들에 대해 감정을 가지고 있기는 한건가?
2005년도에 나는 어머니에게서 어쩌지 못하는 "애증"을 느꼈다.
지금은 제멋데로 노는 아이에게 건성으로 대답하는 피곤에 찌든 부모를 보는 느낌이다.
알런의 부모들은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버린 걸까?



알런을 다이사트 박사에게 부탁하는 판사는.
아무래도 직업이 잘못 표기된 것 같다.
내가 느낀 그녀의 모습은 다이사트 박사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는 여비서에 불과했다.
늘씬한 다리를 보란 듯이 꼬고 앉아서
심각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도로 알런을 부탁하고 종종 찾아와 경과를 듣는 그녀는
당황스러웠고 깊이감이 없었다.
마치 가십기사를 대하는 여비서의 포즈 그대로였다.
그녀가 구하고 싶었던 건 불쌍한 알런의 영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판사가 유부남 정신과 의사를 상대로 신분상승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조용히 그녀의 손을 붙잡고 다른 정신과 의사를  만나게 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돈많은 재벌 노인네라도 소개시켜줘야만 할 것만 같다.



...... 혼란스러웠다. 연극 《에쿠우스(Equus)는 비극인데 관객은 숭고한 주인공이나 좌절이 아니라 다른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의 넋을 낚아챈 건 무대 위를 뛰어다니는 말(馬)들이었다. 절대 다수인 여성 관객은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때 온통 말 이야기뿐이었다.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근육질의 말 같았다. 그렇다면 연극이 변한 것인가, 관객이 달라진 것인가...... 이 연극은 미완성이다. 비극을 사랑한 관객은 실망했을 수도 있다. 말들을 강조한 이번 《에쿠우스》는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서성이는 것 같았다. 대중성을 얻었지만 작품의 정신까지 전달됐는지는 모르겠다. 즐기다가도 서글퍼졌다......

누군가 이런 기사를 썼다.
그리고 나는 전적으로 이 기사에 동의하며
이렇게 동의해야만 하는 게 너무 화가 난다.
"과연 나는 누구를 숭배해 본 적이 있는가?"
알런을 치료하며 스스로 던지는 다이사트의 질문은 공허해지고 말았다.
더불어 알런이 미치게 부럽다고 말하는 그의 고백 또한 정당성을 잃었다.
말의 성전에서 의식을 치르고 널브러진 알런을 부등켜 안으며
내가 널 치료해주겠다고 했을 땐
"너나 잘하세요!"라며 친절한 금자씨가 되어 말해주고 싶었다.
피곤에 찌든 다이사트가 자신의 힘으로 구할 수 있는 건 과연 뭘까?



2005년 내가 그토록 정열적으로 봤던 에쿠우스는
성적인 판타지를 주는 애로물도
턱없는 웃음을 주는 코믹물도 아니었다.
내 기억 속 알런과 너제트가 의식을 치루듯 달리는 장면은
성스러웠고 장엄했었다.
(그리고 나는 분명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었다)
그러나 떡칠(?)을 하고 나온 건장한 보디빌더들이 취하는 과한 동작들은
경박한 섹스코드를 눈 앞에 들이대는 것 같아 불쾌하고 난감하기까지 했다.
남창처럼 외부에 전시된 썬텐된 그들의 몸을 보며 나는 연극 <에쿠우스>의 비극성을
연극이 끝난 로비에서 느닷없는 느꼈다.
(그나마 그들 얼굴이 두꺼운 분장으로 덮여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맨 얼굴로 그렇게 서있었다면 얼마나 서로 난감했을까?)



2005년 포스터를 찾아 보면서 
같은 작품도 누군가에 의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걸 실감하며
나는 심각하게 <에쿠우스>에 대해 현재진행형으로 당황하고 있다.
어쩌면... 어쩌면...
김영민 알런과 남명렬 다이사트가 너무 강렬했기에 내게 <에쿠우스>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결코 그 고정관념을 나는 결코 깨고 싶지 않다.
2005년 <에쿠우스>는 내겐 분명 구원같은 작품이었는데
2009년 <에쿠우스>는 내겐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이 연극에 진심으로 칭클창클을 메고 싶다.
너접한 푸줏간을 다녀온 느낌이다.



    -----  only 퍼포먼스 <에쿠우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