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6. 1. 8. 08:20

프랑스 작가 서머싯 몸(1874~1965)에 의해 화가 폴 고갱(1848~1903)의 삶은 부활됐다.

생전에 빛을 보지 못한 고갱의 작품들은 

서머싯 몸이 1919년 발표한 <The moon and Sizpence> 소설로 인해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그림값까지 무섭게 치솟았다.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은 예술가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딜레마를 뜻한다.

사실 이 책은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를 통해 알게 된 책이다.

작가와 제목은 알고 있었지만

이 소설이 고갱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라는건 몰랐었다.

2013년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고갱 기획전시를 했었다.

그때 전시 제목이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이었다.

당연하겠지만 그림 속 배경은 고갱의 마지막 낙원 타이티섬이었다.

직업과 가족을 버리고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선 고갱은 타이티섬으로 떠나면서 말했다.

"나는 고요함을 찾아, 그리고 문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떠난다. 나는 단순한, 아주 단순한 예술을 하고 싶다."

말년에 불화가 생기긴 했지만 고흐는 고갱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멀리서 온 사람이고 또 멀리 갈 사람이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고갱은 확실히 무책임하고 비열했다.

뭐가 됐든 그는 가족을 버리고 열대지방으로 도망쳤다.

인과응보였을까?

가난, 매독, 다리 부상, 전시 실패, 질병, 소송, 실연, 자식의 죽음, 자살 시도... 

그리고 결국은 심장마비로 홀로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고갱의 색채 속에 강렬한 "살의(殺意)"를 느낀다.

내게 고갱의 삶은 그렇다.

<달과 6펜스>의 고갱은 당당하고 자유롭고 무례하고 거침없다.

살의가 아인 버팀이 읽혀진다.

그래서 사실 다행이었다.

 

......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하였지만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태어난 곳에서도 마냥 낯선 곳에 온 사람처럼 살고, 어린 시절부터 늘 다녔던 나무우거진 샛길도, 어린 시절 뛰어 놀았던 바글대는 길거리도 한갓 지나가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가족들 사이에서도 평생을 이방인처럼 살고,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보아온 주변 풍경에도 늘 서먹서먹한 기분을 느끼며 지낼지 모른다.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 바로 그러한 느낌 때문에 그들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뭔가 영원한 것을 찾아 멀리 사방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

 

이 책에 나오는 구절 중 고갱을 표현한 가장 정확한 문장.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

고백컨데 고갱의 색채에서 내가 느끼는 "살의" 역시 이 문장과 무관하지 않다.

비참하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고갱은 타이티라는 낙원을 찾아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나는...

고갱이 찾아낸 그 낙원이 죽도록 부럽다.

 

소설을 읽는 내내 고갱의 질문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나는 낙원에서 살아봤어!

 그런데 너는?

 너는 한 번이라도 낙원이란걸 꿈꿔보기라도 했어?"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3. 3. 20. 08:56

벼르고 별렀던 전시회를 드디어 다녀왔다.

지난번에 보려고했는데 지하까지 이어진 줄을 보고 포기했었다.

이번주 토요일로 전시가 끝나서

아예 작정을 하고 아침 10시 오픈 시간에 맞춰 여유롭게 관람하자 작정했다.

(그런데 일요일에 예술의 전당을10시까지 간다는 건... 좀...)

확실히 여유있게 관람할 수 있있다!...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이미 관람객들로 가득했다.

우리나라 어머님들의 교육열에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금치못했고...

가족단위로 관람객도 많았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심지어 미취학 아동들도 상당히 많이 보인다.

아예 어린이를 위한 해설 시간도 따로 있더라.

그런데 아이들은 아무래도 그림이나 큐레이터의 설명보다는

스마트폰 어플로 듣는 해설에 더 집중하는 것 같다.

확실이 요즘의 아이들은 엄청난 문화적 혜택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다만, 그게 아이들의 자발적인 희망사항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권유나 강제성에 의한 것은 것이라면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긴 하다.

자녀를 위한 놀라운 교육열에

전시장 안에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매너도 함께 가르친다면 더없이 좋겠다. 

그리고 어디가 됐든 목숨걸고 인증샷을 남겨야만 한다는 강박(?)에 빠진 아이들을 제어하고

가열찬 토론의 장 혹은 일방적인 엄마의 작품 해설은

공개적이 아니라 가족의 밥상머리 이벤트로 개최하는 현명함도 함께 가르쳐 주시길...

 

                                                                              <황혼녁의 가을 풍경, 1885>

 

이 전시는 1886년부터 1888년까지 반 고흐가 파리에 머물면서 그린 작품으로만 기획됐다.

파리 시기 이전의 그의 그림을 보면,

<황혼녁의 가을 풍경> 처럼 색채도 어둡고 전체적인 느낌도 공포감이 느껴질만큼 괴기스럽고 암울하다.

우리가 알고 있고 고흐의 색채를 보기도 어렵고...

2년 여간의 파리 시기를 거치지 않았다면,

아마도 아를에서의 그 아름다운 색채는 탄생하지 못했을 거다.

그만큼 이 시기가 화가로서 고흐의 정체성과 독자성이 형성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다.

이 시간 동안 고흐는 93 점의 그림을 남겼는데

궁핍한 삶을 반영하듯 재활용 캔버스에 그린 그림과 자화상, 정물화 등이 많이 비중을 차지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림을 X-ray로 투사한 사진들도 함께 전시됐는데

원그림 밑에 다른 그림이 그려져있는 걸 보면서 깊은 연민이 느껴졌다.

고흐의 가난은 불행이었을까? 행운이었을까?

인간으로서의 고흐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고흐의 삶이 주는 그 모든 압박감과 책임감들.

그 괴리감을 고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림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

1887년 여름 파리.

고흐는 분명 불행한 상태였지만 완전히 절망하진 않았었다.

그러나 3년 후인 1890년 7월 25일.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 있는 그 자체다"

라는 말을 남기고 고흐는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

그 당시 그가 받았던 고통들을 이제 그의 그림이 고스란히 감당하고 있다.

그래서 고흐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찬란한 빛 속에서도 강렬히 파고드는 아픔이 있다.

떄론 그 아픔이 너무나 실제적이라 섬뜩하다.

무엇으로도 위로될 수 없는 아픔.

고흐의 색채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내 눈을 찌른다.

 

                                                                                         <화병에 담긴 카네이션 1887> 

                                                                         <해바라기가 있는 풍경/여인의 초상 1887> 

                                                                                                                            <비너스 토루소(마분지에 유채)>

<화병에 담긴 카네이션>을 만난 순간 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입체감이 살아 잇어 마치 실체 꽃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심지어 꽃에서 찬란히 빛이 발했다.

비슷한 느낌의 세로 그림 <화병에 담긴 꽃>과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는데

유독 이 그림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들어서 허리가 꺾인 꽃송이도,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도 후~~~ 불면 날아갈 것 같다.

대비되는 배경색과 더불에 전채적인 색감에 감탄이 절로 난다.

슬쩍 손을 넣어 한송이 집어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게다가 가까이에서 볼 때의 느낌과 좀 떨어져서 볼 때의 느낌이 또 확 다르다.

멀리서 볼수록 빛의 생동감이 더 살아있다.

어쩐지 정말 진한 향기도 있을 것 같다.

 

<해바라기가 있는 풍경>과 <여인의 초상>은 하나의 캔버스에 앞, 뒤로 그린 그림이다.

(어쩌면 붙였는지도....)

궁핍의 흔적이었는지 의도된 활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 뒤 작품의 색감이 대비되는 게 또 묘한 여운을 준다.

초록을 앞세우며 하늘 향해 우뚝하게 서있는 청년의 시절, 그 뒷면에 그려진 노년의 모습.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존재론적인 질문이 담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캔버스 살 돈이 궁해진 고흐는 두꺼운 마분지에 유화를 그리기도 했다는데

<비너스 토루소>가 바로 그 작품들이다.

유화보다 색의 깊이가 얇긴 하지만 색감은 정말 기가 막히다.

코발트 블루? 아니며 터키 블루라고 해야하나?

아주 단순한 색의 조합인데도 색감이 풍부하다.

명암과 농담의 표현이 석고상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이 작품들 앞에서도 꽤 오래 머물렀다.

 

                                                                                                  <식당 내부 풍경, 1887>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1887>

                                                                                                  <쟁기로 간 들판, 1886>

전시실 중간중간에 관람객이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을 마주보는 의자에 앉으면 삼각형 구도로 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정면으로는 고흐의 자화상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실당 내부 풍경>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쟁기로 간 들판>이 있다.

(이 자리!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영구임대라도 하고 싶었다.)

 

<식당 내부 풍경>은 빛으로 가득하다.

점묘법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점 하나 하나가 그대로 빛이다.

조명의 효과인가 싶어서 정말 여러 각도에서 오랫동안 봤는데 확실히 그림 자체에서 발화되는 빛이었다.

도대체 1887년에 그린 그림의 빛이 어떻게 아직까지도 이렇게 선명하게 살아있지?

포근하고 따뜻한 작품이 내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선묘법으로 그려진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은 좀 떨어져서 보면 색감이 훨씬 좋다.

선 하나하나가 섞이면서 본래의 색으로 통합된다.

배경과의 경계도 좀 떨어져서 볼 때 명확하게 느껴지고 표정도 훨씬 풍부하게 살아있다.

작품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좀 떨어져서 보시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면 당신들이 보는 것, 그 이상을 보게 될거라고...

특히 이 자화상은 꽤 많이 알려진 작품이나 유난히 관객들이 몰려있어 안타까웠다.

아직 우리는 Zoom의 시선이 주도적인 모양이다.

 

전시회를 가면 혼자 하는 개인적인 버릇(?)같은 게 있다.

전시된 작품들 중에서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작품을 선택하겠는가?

이번 전시에서 내가 선택한 작품이 바로 <쟁기로 간 들판>이다.

이 작품은 꼭 가까이에서 봐야 한다.

이제 금방 쟁기가 지나간 듯 생생하게 파헤쳐진 흙의 질감과 형태.

나이프로 물감을 두껍게 찍어 누르듯 펴바른 이 그림은

물감의 두께만으로 원금감 전부가 표현된 것 같다.

하늘과 구름의 표현도 정말 활홀할 정도다.

거칠고 투박하게 그려낸 것 같은데

그 표현이나 색감의 질, 깊이가 너무나 섬세해서 입이 몇 번씩 벌어졌다.

이 작품을 본 시간을 다 합치면 아마도 1시간은 족히 되지 않을까?

몇 번씩 다시 가서 봤는지 모른다.

사람이 좀 없다 싶으면 주저하지 않고 이 작품 앞으로 갔다.

훔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길만큼 나를 압도했던 작품이다.

지금도 눈 앞에 이 그림이 떠나질 않는다.

설마 그 정도일가 싶겠지만

이 작품은 꼭 직접 눈으로 봐야만 한다..

도록에 인쇄된 그림이나 인터넷상으로만 보면 도저히 그 느낌을 알 수 없을거다.

단언컨데 단 10%로도!

 

                                                                                                        <연인이 있는 풍경, 1887>

선묘법과 점묘법으로 그린 <연인이 있는 풍경>은 정말 사랑스럽고 따뜻한 작품이다.

그림 자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다.

"우린 지금 사랑에 빠졌어요~~~"라고...

서로를 향해 살짝 기울어져 있는 연인들의 모습에 내가 다 셀렌다.

여자를 향한 남자의 섬세한 배려도 눈에 보이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저 연인들의 뒤에 숨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몰래 듣고 싶다.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시기가 고흐에게 있었다는 게 참 다행이다.

비록 캔버스를 살 수 없을만큼 궁핍한 삶이었어도

파리 시기는 고흐에겐 일종의 평화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고흐의 인생 전부가 불행했던 건 아니었음을 이 작품을 보고 알았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위로받았다.

확실히 따뜻했다.

 

오후가 되니 관람객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북쩍이는 관람객에 떠밀려 자의반타의반 나오면서도

이 좋은 시간들이 눈에 선해서 마냥 아쉬웠다.

정학한 일정이 잡힌 건 아니지만 고흐 세 번째 기획전시도 예정되어 있단다.

오늘의 이 아쉬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가

다시 만날 고흐의 그림 앞에서 조용히 풀어내야겠다.

기다렸었다고...

그리웠다고...

보고싶었노라고...

 

* 6월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폴 고갱의 전시회도 열린단다.

  덕분에 올해는 문외한인 눈도 기쁨에 환히 웃겠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