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8. 12. 13. 08:24

 

<랭보>

 

시 : 2018.10.13. ~ 2019.01.13.

장소 : 대학로 TOM1관

작가 : 윤희경

작곡 : 민찬홍

음악감독 : 신은경

연출 : 성종완

출연 : 박영수, 정동화, 손승원, 윤소호 (랭보) / 에녹, 김종구, 정상윤 (베를렌느) / 이용규, 정휘, 강은일 (들라에)

제작 : 라이브(주), (주)데블케이필름앤씨어터

 

아르튀르 랭보(1854~1891).

여덞 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서 스무 살에 절필한 천재 시인.

예전에 대학때 어떤 선배에게 생일 선물로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받았었다.

(예전에는 그랬다. 생일에 시집을 선물하고 그랬다.)

어린 마음에 제목이 주는 압박감이 커서 쉽게 들춰보지 못했었다.

비관주의와 종말론의 끝판을 볼 것 같아서...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제목과는 반대로 아름다운 시와 글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가 뮤지컬로 만들어진다고 해서.

그렇다면 그의 동성연인이었던 폴 베를렌느(1844~1896) 이야기도 빠질 수 없을거고

그의 시들이 어떻게 작품 속에 표현되고 스며들지 궁금했다.

(특히 "모음들"이란 시가 나올지 궁금했는데... 세상에나... 나온다.)

랭보는 시인은 "견자(見者)"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뮤지컬 속에선 "견자(見者)"가 "투시자(透視者)"로 표현된다) 

시인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게 아니라

왜곡된 시선으로 투시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마약과 술을 비롯해서 온갖 방탕한 생활을 겪어야만 한다고...

스무살에 절필한 시인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상당히 파격적이긴 하다.

랭보는 두 권의 책을 썼는데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랭보가 고작 19살에 쓴 책이다.

그 당시 500부를 찍었다는데 대금 미지급으로 인쇄업자가 보관하고 있다가

랭보가 37에 생을 마감하고 2년 뒤 뒤늦게 빛을 보게 된다.

동성연인 베를렌느와 헤어지고 절필을 한 랭보는

(베를렌느는 정말 랭보를 죽이려고 총을 겨눴을까? 나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네덜란드 식민지 부대에 용병으로 있다 탈영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무기 장사와 이것 저것 잡다한 무역상을 하기도 했고

막판엔 골수암에 거려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기까지 한다.

(다리를 절단한 진짜 이유가 "매독"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 당시 많이 그랬으니까...)

시, 산문, 그리고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던 랭보는

확실히 불운한 천재이자 광기의 시인이긴 하다.

어느 시대에 태어났든 순탄하지 못했을 인생이다.

그냥... 다 아프고 가련하다.

랭보도, 베를렌느도.

 

작품은...

기대 이상으로 잘 만들어졌다.

무대를 세 부분으로 나눠 시간, 공간의 구분을 자연스럽게 이끈 것도 아주 좋았고

천천히 바뀌는 무대 조명은 빛도, 색감도 그대로 한 편의 시(詩)였다.

랭보와 베를렌느 두 사람의 시도 이야기 속에 잘 녹아들었고

해설자이자 keyman인 들라에의 존재도 과하지 않고 좋았다.

(개인적으로 해설자가 너무 많이 개입하는걸 좋아하지 않아서...) 

그리고 무엇보다 뮤지컬 넘버들이 너무 좋다.

따로 OST도 발매한다는데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이 있는 넘버들이다.

세 배우의 연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대사톤이 끝장이었다.

그냥 정상윤이 베를렌느인 것 같고, 윤소호가 랭보인 것 같았다.

감정적으로 울컥한 부분들이 많아서 개인적으론 좀 아팠다.

그냥... 뭐 여러가지 것들이 겹쳐져서...

 

랭보가 그랬다.

La vie est aileurs... 라고.

인생은, 여기에 없다.

(어쩌면 정말 그런지도...)

 

* 덕분에 오랫만에 랭보의 시들을 펼쳤다.

  더불어 베를렌느의 시들도.

 

<모음들>  - 랭보

 

검은 A, 흰 E, 붉은 I, 초록 U, 푸른 O, 모음들

내 며칠 너희들의 숨은 탄생을 말하리라.

아(A), 지독한 악취 주변을 윙윙대며

번쩍이는 파리 떼들 뒤덮인 검은 코르셋

 

어둠의 만(灣)으(E), 증기와 장막의 순진함,

그이의 얼음 창(槍), 하얀 왕들, 산형화(散形花)의 소름,

이(I), 자주빛, 각혈,

분노 혹은 참회의 취기속 그 아름다운 입가 웃음.

 

위(U), 순환, 초록빛 바다의 신성한 동요,

짐승들 뿌려진 방목장의 평화,

근면한 이마에 새겨진 연금술

 

오(O), 이상하게 째지는 지상 최고의 나팔,

지상과 천상을 꿰뚫는 고요,

오(O), 오메가, 그 눈의 보랏빛 광선!

 

<감각(Sensation)> - 랭보

 

여름날 푸른 석양녁에 나는 오솔길을 걸어가리라

밀이삭에 찔리며 여린 풀 밟으며,

꿈꾸듯 내딛는 발걸음. 나는 산뜻한 풀잎들을 발에 느끼며,

들바람이 나의 맨머리를 씻게 하리라.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리,

그러나, 맘 속에 솟아오르는 끝없는 사랑

나는 가리라, 멀리 더 멀리 마치 보헤미안처럼

자연 속을 여인과 함께, 행복에 젖어.

 

<가장 높은 탑의 노래> - 랭보

 

오라, 오라,

도취할 시간이여.

 

얼마나 참았든가!

내 언제까지나 잊었네

공포와 고통도 하늘 높이 떠나갔고

불쾌한 갈증이

내 혈관을 어둡게 하네.

 

오라, 오라,

도취할 시간이여.

 

잊게 되어있고,

더러운 파리떼

기운차게 윙윙거리는데

향과 가라지를

키우고 꽃피우는 들판처럼

 

오라, 오라,

도취할 시간이여.

 

<나의 방랑> - 랭보

 

속이 터진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나는 떠났다.

나의 외투는 더할 나위 없이 닳아빠져 어쩜 그렇게도 어울리는지!

창궁 아래를 걸어가네. 뮤즈여, 나는 그대의 충복.

오! 라, 라, 내가 꿈꾸었던 것은 눈부신 사랑이었노라.

 

한 벌 밖에 없는 나의 반바지는 커다란 구명이 나고

어린 몽상가인 나는 길을 따라가며 시를 뿌렸다.

나의 여인숙은 큰곰자리,

하늘의 내 별들은 다정하고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나는 길가에 앉아 별들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상쾌한 구월의 저녁, 포도주같은

밤이슬 한방울이 이마 위로 떨어진다.

 

환상적인 그림자들의 한가운데서 운을 맞추듯

나는 가슴 가까이에 한쪽 발을 치켜들고

내 닳은 구두의 구두끈을

마치 칠현금을 타듯이 잡아당겼다.

 

<초록> - 베를렌느

 

열매, 꽃 잎, 가지들이 여기 있고.

그리고 오로지 당신만을 향해 고동치는 내 마음이 여기 있고

그대 하얀 두 손으로 찢지는 말아주오.

다만 이 순간 그대 아름다운 두 눈에 부드럽게 담아주오

 

새벽바람 얼굴에 맞으며 달려오느라

온몸이 얼어붙은 이슬방울 채 가시지 않았으니

그대 발치에 지친 몸 누이고

소중한 휴식의 순간에 잠기도록 허락해 주오.

 

그대의 여린 가슴 위에 둥글리도록 해주오.

지난번 입맞춤에 아직도 얼얼한 내 얼굴을,

그리고 이 선한 격정이 가라앉게 그대 달래주오.

그대의 휴식 속에 가만히 잠들 수 있도록.

 

<애수> - 베를렌느

 

장미꽃은 새빨갰었다.

담장의 잎은 시커맸었다.

그리운 이여, 그대가 꼼짝만 하면

나의 절망이 모두 되살아난다.

하늘은 너무나도 푸르고 너무나도 부드럽고

바다는 너무나도 초록이고 공기는 너무나도 달콤하였다.

나는 언제나 두려워한다. 이것이 기다림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무참하게 나를 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옻칠을 한 듯한 호랑가시나무 잎에도

번들거리는 회양목 나무에도

끝없는 광야에도

당신 이외의 모든 것에 나는 진력이 났다

 

<감상적인 산책> - 베를렌느

 

석양이 그 최후의 광선을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은 창백한 수련들을 보듬고 있었다.

커다란 수련들은, 갈대 사이에서

조용한 물위에 슬프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홀로, 내 고통을 산책시키면서

연못을 따라 버드나무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그곳에는 희미한 안개가

날개치며 서로 부르는 상오리의 목소리와 함께

울고 절망하는 커다란 유령을 부르고 있었고,

내 고통을 산책시키면서

나는 홀로 버드나무 사이를 걷고 있었다

이윽고 암흑의 짙은 수의가

오더니 익사시켰다

창백한 물결 속에 석양의 마지막 광선을

그리고 갈대 사이의 수련들을,

조용한 물 위의 커다란 수련들을.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