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 끄적끄적2015. 7. 16. 08:43

가우디투어를 유로자전거나라로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추가 요금없이 잔향되는 야간 워킹 투어를 할 수 있어서다.

가우디 투어와 야간투어를 같이 하는건 체력적으로 엄청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고딕지구 골목 골목을 밤에 돌아다닌다는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 신청했다.

그런데...

이 야간 워킹 투어가 내겐 "신의 한 수"였다.

그렇다고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니다.

옛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벽과 조용조용한 가로등,

큐비즘의 대가 피카소의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의 배경이었던 아비뇽의 골목길,

그리고 가이드가 MP3로 준비해온 영화 "향수"의 OST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영화의 OST, 정말 정말 정말 좋다.)

영화 "향수"의 촬영지였던 바르셀로나 고딕,보른 지구.

영화에서 향수 제조 공장으로 나왔던 곳은 실제로는 오래된 향수 가게였다.

그루누이가 여인의 향취에 취해 몰래 들어간 골목길과

살인하는 순간 비춰진 건물의 외벽까지.

혹시 이 어둠을 뚫고...  

그루누이가 향취도 없이 내 곁을 스치건 아닌가 연신 두리번거렸다. 

 

 

가로등 밑의 외벽에 푹푹 빠인 자국이 있어 물었더니

스페인 내전때 벽에 사람들을 세워놓고 그대로 총을 쏘아 처형을 했었단다.

그저 오랜 세월의 흔적일거라 생각했는데 가슴 한켠이 뻐근해온다.

내전을 겪은 국민들이라는 공통점.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의 흥이 낯설지 않았던 모양이다.

가슴을 쥐어 뜯듯 아프고 아파도,

평생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처럼 고통스러워도,

사람들은 웃는다.

살아내야 하니까...

죽지 않겠다 다짐했으니까...

총알이 만들어낸 학살의 흔적 앞에서

나는 장엄한 생(生)을 느꼈다.

불타는 삶을 느꼈다.

시간은 그렇게 수직으로 흐르다 수평에서 잠시 멈췄다.

 

 

고요한 가로등.

골목 안으로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흡수된다.

빛이 부족해 움직임을 포착해내지 못하는 카메라엔

공간이 아닌 시간이 담긴다.

그게 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같다.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지금 다른 세계 속으로 가고 있는 중인거다.

함께 하는 일행들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조용히 그 줄에 따라붙어 그들의 여행을  모르겠다.

 

 

고딕지구의 핵심 왕의 광장.

이곳에는 중세 바르셀로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왕의 광장이라 불리게된 이유는,

저 웅장한 건물이 과거 아라곤 왕의 실제 궁전이었기 때문이다.

왕궁 아래 삼각형 계단은

첫 항해를 마친 콜롬버스가 왕을 알현하기 위해 올랐던 역사적인 장소다.

지금은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응접실 역할을 하는 곳.

어둠 속에 묻힌 바르셀로나 대성당도 낯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더 위엄있고 어딘지 모르게 완강한 느낌.

하지만 주변 계단은 한 치의 망설임없이 사람들을 품고 또 품는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바르셀로나의 고딕, 보른 지구는 확실히 그렇더라.

 

 

야간 워킹 투어의 마지막 장소는 카탈루나 음악당.

이곳은 "꽃의 건축가"로 불리는 몬타네르의 최고의 걸작품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콘서트홀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

건물 외관과 내부 장식이 화려하기로 유명하다는데

문이 닫혀 있어서 창문 틈으로 훔쳐보기만 했다.

바르셀로나 도착하면 꼭 카탈루나 음악당에서 공연을 보겠노라 생각했는데

이것 역시도 쉽지 않더라.

2박 3일의 일정 중 하필이면 내가 떠나는 날 저녁에 공연이 잡혀있더라.

그렇게 지나쳐오는 도시마다 아쉬움이 하나씩 쌓여갔다.

 

스페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고

내일이면 피렌체와 로마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로 넘어간다.

오래 걸어 몸은 극도로 피로했지만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러다 혼자 침대에 누워 지나온 도시마다 남겨둔 아쉬움들과 작별 인사했다.

영화 "향수"의 OST를 BGM으로 깔고...

 

이 여행 또한,

기억되고 잊혀지리라.

상관없다.

스쳐지나가는 순간일지라도 또 다시 떠날 이유를 찾아야겠다.

늦게 바람난 사람처럼...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