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2. 6. 18. 08:32

<그을린사랑>

 

일시 : 2012.06.05. ~ 2012.07.01.

장소 : 명동예술극장

원작 : 와즈디 무아와드

연출 : 김동현

대본, 드라마투르기 : 배삼식

작곡, 음악감독 : 정재일

출연 : 이연규, 배해선, 남명렬, 백익남, 이윤재, 박성연, 김주완

        전박찬, 이진희, 이다아야.

 

이 연극을 대해 과연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연극이 아니라 고통스런 역사이고, 처참한 고발의 르포이자 그리고 처절하고 사실적인 다큐다.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한 작품이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고귀하고 장엄하고 웅장해서 황홀했다.

연극을 보고 한동안 복기(復記)조차 엄두도 못 낼 만큼 황폐하고 황량했다.

그래, 나는 이 연극에 완벽히 압도당했고 그래서 결국 오래 침묵했다.

나는 나왈의 침묵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노라 감히 말하련다.

무대에 우뚝 솟은 몇 개의 구조물을 보면서 나는 아주 오래전 역사를 기록해 우뚝 세워논 오벨리스크를 떠올렸다.

그들만의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선택된 소수의 사람에 의해서만 온전히 해독할 수 있는 묵시록적 언어.

그건 일종의 금기이자 경고이기도 하다.

"우리 함께 있으니 모든 게 나아질거야"

5년 동안 긴 침묵으로 일관했던 나왈의 죽기 전 내 뱉은 문장.

이 문장이 화인(火印)이 되어 작품의 모든 여정은 시작된다.

시간을 되밟는 여정,

과거를 추적하는 여정,

그리고 결국 너무나 끔직하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나의  기원,

나의 태(胎)을 찾아가는 여정.

 

나왈의 유언장이 쌍둥이 남매 시몽과 잔느에게 공개되는 날,

유언집행인은 남매에게 두 장의 편지와 함께 다음과 같은 유언을 전했다.

잔느에게는 너희들의 아버지를 찾아 편지를 전할 것을,

시몽에게는 너희들의 형을 찾아 나머지 편지를 전할 것을.

그 두 장의 편지가 아버지와 형이 읽게되면 또 다른 한 장의 편지가 공개될거라는 단서와 함께...

단 한 번도 어미로써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던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들은 남매는 혼돈에 빠진다.

지금껏 죽은 걸로 알고 있었던 아버지와

그리고 존재 자체도 몰랐던 형을 찾으라는 유언.

 

여자는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기꺼이 전사(戰士)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족의 역사가,

그 가족의 기원이 깊고 완강한 침묵이 될 수밖에 없다면?

남겨진 사람은 이제 선택을 해야한다.

금기를 깨부수고 침묵에 정면으로 소리를 치든지

아니면 더 깊고 오랜 침묵 속으로 숨어버리든지...

 

두 장의 편지는 남매에 의해 그들의 아비와 그들의 형에게 전달된다.

두 사람은 기원을 찾는 방정식을 풀었다.

1+1=2가 아닐 수 있다는 수학의 명제.

너무나 뻔한 명제가 뒤집힌 것처럼 충격적이고 잔인한 진실과 그들 모두는 대면중이다.

그들의 아비가 바로 그들의 형(오빠)이고, 

그들의 형(오빠)이 바로 그들의 아비라는 진실.

이 모든 게 과장이라고, 단지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지 말자.

명예살인과 부계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같은 나라라도 부족간의 생사를 거는 싸움이 난무하는 곳.

그곳에서 지금 일어나는 있는 일들은 이 사건보다 더 충격적이고 극악무도하다.

우리는 이 재앙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이 금기를 무엇으로 깨부술 수 있을까? 

나왈은 근원적인 "사랑(모성)"에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사랑이 있는 곳에 증오는 있을 수 없다!"

비록 태를 끊는 순간 바로 난민촌으로 보내졌던 아이였지만 아기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나왈은 맹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널 언제나 사랑할거야!"

애타게 아들을 찾아다닌 나왈.

25년이 훌쩍 지나 드디어 두 사람은 재회하게 된다.

그러나 잔인하게도 그 둘은 서로의 태(胎)를, 서로의 근원을 알아볼 수 없었다.

포로로 잡힌 어미 나왈은 고문기술자로 불리는 자신의 아들에게 강간당한다.

그 후에 태어난 쌍둥이 아이...

 

이다아야. 배해선, 이연규가 연기한 나왈은

처음엔 순수했고, 나중엔 강인했고, 그리고 마지막엔 비장하고 웅장했다.

특히 이연규 나왈의 법정 장면과 편지 장면은 너무나 압도적이라 보는 내내 너무 비참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 숨통을 조이는 느낌이었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극도의 공포심까지 느꼈다.

참담함. 참담함. 참담함.

그러나 드디어 개봉된 마지막 편지.

나왈은 쌍둥이 남매의 아비이자 자신의 아들에게 말한다.

"넌 사랑으로 태어났다. 그러니 네 동생들도 역시 사랑으로 태어났다 .... 사랑이 있는 곳에 증오는 있을 수 없다"

용서와 이해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선명하고 잔인하다.

그러나 여기에 누가 감히 정의를 운운하며 비난의 말을 퍼부을 수 있을까?

(정의는 개나 물어가게 놔두라지!)

누구라도 그럴 순 없다!

이건 비극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니까.

 

작품 전체를 관통하던 현과 건반을 읽으며 여러 번 감탄했다.

(음악감독 정재일에게도 깊은 찬사를...)

격정적이고 비장한 현의 울림.

땔로는 밝은 종소리로, 때로는 웅장함으로 극의 간극을 채웠던 건반의 떨림.

전쟁의 참상을 떠올리게 하는 아득한 포탄소리.

귀기(鬼氣)가 느껴지갸ㅔ 섬득하면서도 아름다웠던 구음(口音)들.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르르 떨어지던 모래와 그 모래를 적시던 물.

거대한 구조물에 투영된 의미 심장한 영상들.

보도 듣는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의미였고, 하나의 진언이었고, 하나의 진혼곡이었다.

보고난 후 오래 아팠고 힘들었다.

나는 내가 본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해서든 제대로 기록해낼 수 없을테다. 결코!

 

* 10명의 배우 모두에게 한 순간도 경의를 표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가장 아름답고 위대했다.

   그러니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 강건하시길...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