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4. 4. 22. 07:26

<알리바이 연대기>

일시 : 2014.04.17. ~ 2014.04.20.

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극작 : 김재엽

연출 : 김재엽

출연 : 남명렬, 지춘성, 정원조, 이종무, 전국향, 유준원, 유병훈, 백운철

 

이 연극...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만큼 놀라운 작품이다.

아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는 아버지의 일생이라는 덤덤한 이야기 속에 일제 강정기부터의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짧지만 그 어느때보다 방대하고 치열하고 암울했던 시대.

그 시대의 끄트머리를 지나온 나에겐 어린 세대들에게 박물관 역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경계인과 주변인도 못됐던 내조차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몇몇의 사건들.

그걸 보면서 "기억"과 "보존"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 작품은 극을 쓰고 연출을 한 김재엽이 10여년 전에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쓴 병상일기가 시작이다.

(작품 속 등장하는 아들의 이름 역시도 "재엽"이다.) 

“제가 3~4개월 동안 아버지의 회고를 들었어요. 그런데 거의 돌아가시기 직전에 했던 말씀이 뭔지 아세요? ‘내가 탈영을 했었단다’라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숨겨놓은 말이었어요. ‘이제 속이 다 시원하다’고까지 하시더군요.”
다행이다.

김재엽의 아버지도 다행이고,

김재엽도 다행이고,

그리고 나까지도 다행이다.

이 작품.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4월 25일부터 5월 11일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다시 공연된다니 일부러라도 찾아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현대사를 이렇게라도 조금 알게 되면 좋겠다.

이해까지는 못하더라도...

 

극장 맨 앞 줄 보조석에 어린 대학생들이 단체로 관람을 하더라.

노파심에 불과하겠지만 그들의 눈에 이 연극이 단지 허구로 보일까봐 걱정스러웠다.

이 아이들 중 몇 명이 장준하를, 그의 어이없는 추락사를,

유신헌법을, 민청학년 사건을,

평화의 댐 성금을, 전교조를,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죽어간 대학생들의 분신을,

문익환 목사의 눈물을 이해할까?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왔다.

그래, 차라리 너희들은 이 모든 걸 몰랐으면 좋겠다!

이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다는걸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면 좋겠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면...

이 작품은 기꺼이 허구로 기억돼도 좋다.

 

아들에게 언제든지 사람이 많이 몰려있는 쪽에 서라고 말하는 아비의 말은,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만큼은 필생(必生)을 위한 절대적인 진리다.

모난 돌이 되어서는 안된다.

중요한 건 앞에 나서지 않고 가운데 서는 일.

죽음을 앞둔 아비의 고백이 나는 너무나 서럽고 서러웠다.

"아비는 피하고 싶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았을까!

피할 수 있다면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았을까!

 

죽음을 앞둔 아비의 마지막 대사가 내내 가슴을 친다.

너무나 옳아서!

반박의 여지가 전혀 없을 만큼 너무나 옳아서

슬프다. 막막하다. 답답하다.

"한국이란 나라는 말이다. 아버지가 살아보니까 진실에 뿌리를 내린 지도자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다. 진실에 토대를 두지 않은 권력은 그 정도나 방향에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두 다 독재나 마찬가지라구. 독재는 말이지, 진실과 함께 할 수 없으니까 거짓을 감추려고 자꾸 알리바이를 꾸며댄다니까. 그래, 그랬던것 같다. 이제 또 어떤 놈이 나와가지고 알리바이를 꾸며댈련지......"

진실에 뿌리를 내린 지도자.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런 지도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그가 남자든, 여자든, 그 누구이든.

(심지어 인간이 아니더라도...)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겠다.

 

일시에 무너지고 가차없이 절망해야 하는 대한민국.

끝없는 알리바이 왕국에 완강한 조의(弔意)를 표하며...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