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5. 5. 8. 07:52

 

<푸르른 날에>

 

일시 : 2014.04.26.~ 2014.06.08.

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극작 : 정경진

각색, 연출 : 고선웅

출연 : 김학선, 정재은, 정승길, 이영석, 호 산, 이명행, 조윤미, 조영규,

        채윤서, 유병훈 이정훈, 김명기, 견민성, 김성현, 손고명, 남슬기,

        홍의준, 김영노, 강대진, 김민서

제작 : 남산예술센터, 신시컴퍼니

 

5월이다.

송착식의 노래처럼 정말 눈이 부시게 푸르른 5월이다.

그리고 그 5월보다 더 푸르고 피보다 더 붉은 연극 <푸르른 날에>가 돌아왔다.

매번 이 작품을 보고 난 뒤엔 가슴을 치며 후회하면서 왜 또 다시 이곳에 왔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또 뭘 그리 견뎌보겠다고...

그래도 한 번은 봐야겠다고. 한 번은 더 견뎌보겠며 더듬더듬 자리를 찾아 앉았다.

2011년 남산예술센터 초연 당시 사전예매 120석으로 시작한 작은 연극 <푸르른 날에>는

2012. 2013, 2014년 전석 매진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15년 지금,

5년 동안 이 작품을 함꼐 해 온 초연 배우 19명의 마지막 고별 무대가 시작됐다.

이 작품은,

소위 말하는 회전문이 불가능한 작품이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이미 강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기 때문에

한 시즌에 두 번을 관람하는게 내 경우엔 도저히 불가능하다.

 

"명랑하게 과장된 통속극"

혹자는 이 작품이 5.18 민주화항쟁은 너무 가볍게 다뤘다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명량만화 같은 한없는 가벼움 속에

뼈를 바수고 살점을 뜯어내는 처절함을 느낀다.

농담을 하려는게 아니라 진담을 표현하기 위해 말을 틀어 변화를 줬다는 고선웅 연출의 변이

그래서 나는 충분이 이해된다.

 

"농담을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본질이라는 거예요. 연극의 본질은 농담이에요. 농담을 통해서 그 진실을 보여주는 거죠. 자기가 직접 겪은 것이라도 무대에서 정확한 에너지를 갖지 못하면 그건 경험한 게 아니에요. 연극은 철저하게 허구화되어 있지만, 그것을 보면서 그 누구도 '그건 허구잖아' 이런 얘기를 할 수 없게 만들죠. 단원들에게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정말 가슴 아픈 얘기지만 우린 행복하게 연극을 하자고요. 가슴 아파하면서는 연극을 할 수가 없어요. 거기서 어떻게 말을 해요. 가슴이 아프고 뼈가 저린데... 그것을 뛰어넘는 연극적 접근이 필요해요. 그렇게 슬픈 연극일지라도 연습하다가 재미없으면 말아야죠. 슬퍼도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작품을 보는 내내 너무 많이 아프고 아팠다.

심지어 한바탕 실껏 웃는 장면에서조차 혼자 주책맞게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내가 신경쓰였는지 옆자리 모르는 분께서 내 손에 휴지를 쥐어줬다.

민망했지만 눈물이 유난히 멈추지가 않더라.

처음 본 작품도 아닌데 이날 관람은 유난히 몸과 마음이 송두리째 아팠다.

미치지 않으면 미친척이라도 해야 살 수 있는 시대,

살아 남기 위해 자신을 다 버려고 부정해야만 했던 시대.

그걸 지나온 사람들의 삶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무서워서 그랬다는 오민호의 말도

누가 우리를 알아나 줄까? 라는 말도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도...

다 통곡이었다.

 

 

예전에 이명행 배우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푸르른 날에> 또 하신다면서요?"

"네!"

"왜요? 힘들고 아프쟎아요, 하지 마세요..."

반어와 역설로 가득한 짧은 대화에 이명행 배우도 나도 웃었다.

그렇게 웃는것 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기도 했다.

이번 초연 배우들의 고별무대를 보면서

젊은 날의 오민호를 해보겠노라 나설 배우가 과연 있을까 걱정됐다.

배우니까 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역할에서만큼은 그 원칙이 적용되지가 쉽지 않을것 같다.

그래서 이명행이라는 배우에게 너무 많이 고마웠고,

그 고마움보다 더 많이 그가 안스러웠다.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세상.

여전히 한 사람 한 사람을 죽이고, 가족을 죽이고, 지역공동체를 죽여

마침내 사회를, 시대를, 인간을 죽여버리는 세상.

작품의 엔딩처럼 꽃비 날리는 날,

그 시대의 사람들과 지금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꿈처럼 한바탕 웃으며 사진을 찍는 날은

영원히 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인 모양이다.

 

산다는건,

뭐 대단한 걸 이루기 위해서가 아닌데...

그저 좋은 날을 위해,

좋은 한시절을 위해 사는 것 뿐인데...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4. 5. 8. 07:58

<푸르른 날에>

일시 : 2014.04.26.~ 2014.06.08.

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극작 : 정경진

각색, 연출 : 고선웅

출연 : 김학선, 정재은, 정승길, 이영석, 호산, 이명행, 조윤미 외

제작 : 남산예술센터, 신시컴퍼니

 

5월이다.

푸르러서 더 서러운 1980년 핏빛 광주의 5월.

그리고 마치 그 5월을 내내 기다리고 있엇다는듯 다시 찾아온 <푸르른 날에>

이상무의 유난스런 동작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초반부터 어쩌자고 객석의 박장대소를 끌어낸다.

계속되는 배우들의 과장된 대사와 액션들.

아마도 사전 정보없이 극장을 찾은 사람은 이 작품을 코믹물로 이해하면서 중반까지 볼 수도 있겠다.

처음 이 작품을 봤을 땐 몰랐었다.

의도된 연출이라는 걸.

무방비상태로 마음을 풀어버리며 웃고 있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쳐 온몸을 후려치던 김남주의 시 "학살 2"

이후로 이 작품은

뼈아픈 고통이 되어 무심히 앉아있던 관객의 살갗을 저며낸다.

고개를 돌리고 싶을만큼 처참하다.

그러나 감히 티를 낼 수조차 없다.

작품으로 느끼는 고통과 현실로 겪은 사람들이 느꼈을 고통 사이에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숨소리를 듣는게 미안해 숨조차 죽였다.

핑크플로이드, 비틀즈, 송창식까지...

음악은 또 왜 이렇게 지랄맞게 아름다운지!

 

너무나 아름다운 배우 이명행.

그는 어쩌자고 오민호라는 역을 네번이나 허락했을까?

왠만한 배우래도 한번이면 나가 떨어져버릴 역을 도대체 왜?

이 작품을 하는 동안은  아무리 강건하고 내공이 쌓인 배우라도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순 없을텐데...

이쯤되면 오민호를 하겠다며 선듯 나서는 젊은 배우가 과연 있을까도 의심스럽다.

젊은 날의 오민호가 물고문을 당하는 장면은,

극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너무 끔직하고 처절해서 차마 못보겠더라.

그런데 이 장면을 이명행 배우는 어떻게 매공연마다....

(이건 자기학대다! 도대체 왜!)

파괴된 육체와 정신으로 김남주의 시 "진혼가"를 읊는 오민호.

단지 앉아서 보는 것뿐인데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명행 배우를 이 작품때문에 처음 알게 됏지만

진심으로 말리고 싶다.

오민호 이제 그만 하라고!

이렇게 계속 하다가는 당신이 결국 남아나질 않을 거라고! 

 

사실은... 사실은...

내내 외면하고 싶은 작품이다.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너무나 충분히 괴롭고 아파서

그 처음이 마지막이며 다짐했던 작품이다.

그런데 또 다시 봤다.

보는 내내 왜 그랬을까 스스로 자학할만큼 이번에도 여지없이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알았다.

외면하면 안 된다는 걸.

아마도 나는 이 작품이 내년 5월에 올라오면

또 다시 자학과 고통 속에서 관람하고 있을거다.

어쩌면... 어쩌면...

이명행 배우에게 왜 또 오민호냐며 무례한 삿대질과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라도,

이 작품은 꼭 봐야겠다.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우리의 "푸르른 날"이 그렇게 잊혀졌고

우리의 "푸르른 날"이 그렇게 되살아났다고!

다 잊고 살다가도

1년에 한 번 떠올리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기꺼이 그 자학 속에 아프게 빠지겠다.

비록 잠깐뿐일지라도

잊지 않고 그렇게라도 아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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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끄적 끄적...2012. 5. 25. 08:29

<푸르른 날에>

 

 

부제 : 오월의 꽃바람 다하도록 죽지 않은 사랑...

일시 : 2012.04.21. ~ 2012.05.20.

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극본 : 정경진

연출 : 고선웅

제작 : 서울시창작 공간 남산예술센터, 신시컴퍼니

출연 : 김학선(여산), 정재은(정혜), 정승길(오진호), 이명행(오민호),

        조윤미(정혜) 외

 

2009년 제3회 차범석 희곡상 수상작 <푸르른 날에>

2011년 초연 공연 당시에도 엄청난 화제작이었던 작품으로 그해 대한민국 연극에 주어지는 모든 상을 휩쓸기도 했다. 

대한민국 연극대상 작품상, 연출상에 연극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 3, 한국 연극 공연 베스트 7위.

남산예술센터와 신시컴퍼니가 2012년 공동제작으로 다시 <푸르른 날에>을 올렸다.

화려한 이력이 오히려 과대포장일 수 있어서 조금 조심스러웠는데

이 작품...

정말이지 말을 잃게 만드는 수작이다.

공연을 보기 전에 반신반의했었다.

지금 이 시대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연으로 보여주겠다고?

얼마나 처절하게, 얼마나 사실적으로, 얼마나 집요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미 지금 세대들에게 5.18은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보다 더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는데...

연극은...

처음에 너무 과장된 신파가 이어져 솔직히 불편하고 난감했다.

그 과장된 목소리와 그 과장된 행동과 그 과장된 감정들.

보면서 감당하기가 힘겨웠다.

 

희극이 비극보다 어려우며 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했던가?

아마도 너무나 비극적인 사실이라 차라리 희극으로 표현해야만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오민호의 물고문 장면은 섬뜩해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때까지 몰랐다.

무대 바닥 깊숙히 물을 담아 놓아서 참 인상적인 무대로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게 공포와 참혹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줄은 몰랐다.

그 장면에서 오민호를 연기한 배우 이명행의 눈빛 속에도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하다.

(이명행 배우에게 깊은 존경심을 보낸다. 이 배역... 힘들었겠다... 피하고 싶었겠다... 무서웠겠다...)

연극이 아니라 르뽀를 직접 목격하는 느낌이다.

본다는 게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버렸다.

비참했고, 미안했고, 구차했다.

마치 내가 그를 고문하는 고문관이라도 된 듯하다.

"무서워서 그랫어. 무서워서!"

죽은 사람들의 환상에 쫒기는 오민호의 외침이 먹먹하다.

나 역시도 너무도 무서웠다.

마치 생명의 위협을 내가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것만 같다.

김지하와 김남주의 시.

송창식과 남진, 핑크플로이드, 비틀즈의 노래조차도 섬뜩하다.

시민군이  김남주의 시 "학살"을 한 대목씩 읊는 장면은 뭐라 말을 할 수도 없다.. 

이 작품 정말 너무나 훌륭하고,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끔찍하다.

다 현실이다.

다 진실이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나라의 역사가 이렇다.

어쩌나...이 작품!

나는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학살 2

                        - 김남주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차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도시로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의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붉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3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하늘의 핏빛은 붉은 천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한 집 건니 떨지 않는 비이 없었다

밤 12시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버렸고

밤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1. 10. 27. 08:06

<꿈속의 꿈>

일시 : 2011.10.08. ~ 2011.10.28.
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출연 : 길해연, 문형주, 장용철, 강일, 송현서, 이혜원 외... 
제작 : 극단 작은 신화
연출 : 신동인

개인적으로 극단 작은 신화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올해만해도 이미 여섯 작품이나 무대에 올렸고, 내가 본 작품만도 세 작품이나 된다. 
<돐날>, <황구도>에 이어 <꿈속의 꿈>까지.
세 작품 모두 독특했고 상당히 괜찮았다.
벌써 창단 25주년이 됐다는데 그 저력이 대단하고
끊임없이 창작을 발표하는 노력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11월에도 <해뜨기 70분 전>과 <우주인> 두 개의 창작이 또 공연될 예정이다.
참 부지런하고 건실한 행보 ^^

<꿈속의 꿈>
2008년 서울연극제 대상, 희곡상, 연기상을 받았던 작품.
2010년에 보고 싶었던 걸 놓쳤는데 다행히 올해에는 시간이 맞았다.
특히나 드라마센타는 내게도 향수와 추억이 있는 장소라 찾아갈 때마다 좀 묘한 기분이 젖게 된다.
많이 변했다는 적요감(寂擾感)?
그런데 가장 많이 변한 게 다름 아닌 나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 곳에서 철학개론 수업을 들었었지!'
옛기억이 꿈처럼 떠오른다.
나 역시도 꿈속의 꿈에 빠져버린거다.
참 아득하고 먼 기억이구나 싶다.



2011년 "대학로 우수작품 인큐베이팅 프로젝트 선정작" <꿈 속의 꿈>
(이해하기 절대 어려운 프로젝트다. 어떤 의미인지는 알겠는데 거의 언어유희 수준의 조합이다.)
‘대학로 우수작품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는
총 5명의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추천위원의 추천을 받은 17개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가 이루어진단다.
5명의 외부전문가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작품이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아 선정됐다고 한다.
작은 <삼국유사> 속의 "매몽설화"를 재조명한 작품이다.
"매몽설화"는 ‘춘추공(김춘추)’과 김유신의 두 여동생 ‘보희’, ‘문희’의 이야기다.
언니인 ‘보희’는 어느날 꿈을 꾸게 된다,
서학에 올라서 오줌을 누는데 그 오줌이 온 나라 안을 가득 채웠다는 내용의 꿈.
동생 ‘보희’는 언니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치마를 벗어주고 그 꿈을 산다.
그리고 ‘김춘추’의 배필이 됐다는 이야기.
연극은 ‘김유신’과 ‘김춘추’의 욕망에 이용당한 두 자매의 삶에 초점을 맞춰진다.
무대는 어딘지 음험한 무덤 속 같고 스멀스멀 기분나쁜 귀기(鬼氣)가 느껴지기도 한다.
중간중간 조그많게 들리는 빗소리도 착시효과를 준다.
(실제로 이날 비가 와서 처음엔 바깥에서 들리는 빗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음향효과더라.)
섬득섬득 이 세상이 아닌 곳 같은 느낌.
조명과 음악, 음향이 너무 효과적이었고
무채색의 의상은 담백한 수묵화를 보는 느낌이다.
그 옷이 또 조명과 만나면 마치 시신을 감싼 수의(壽衣)같다.
대사는 때로는 칼같고 때로는 시같다.
난장(亂場)같기도 하고 제의(祭意)같기도 한,
현재같기도 하고 과거의 회상같기도 한,
이승같기도 하고 저승같기도 한,
몽환적이지만 그렇다고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어떻게 이런 느낌의 작품을 만들었을까?

 
장중하면서도 해햑이 있고
그림자 인형극같은 서글픔도 있다.
무엇보다 엄청난 몰입으로 작품을 끌어가는 배우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억지를 쓰자면 동생 문희역의 길해연이 언니 보희역의 문형주보다 훨씬 노숙한 느낌이라서 민망한 정도 ^^
문희와 젊은 화랑과의 모습도 살짝 유한 부인과 미소년같기도 하고...
그러나 길해연의 독특한 어투와 톤은 나이든 문희 역에 적격인 것 같다.
<기묘여행>에서 코디네이터였던 장용철.
<기묘여행>에서 그의 톤이 하도 독특해서 아마 어떤 역을 하든 그 톤은 변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톤을 보여줘서 놀랐다.
그래도 장용철의 독특한 톤이 김유신을 살짝 사악하고 모사꾼같은 인물로 보이게 하더라.
그게 나빴다는 의미는 아니고 작품과는 잘 어울렸다.
이번 공연에서는 극중극의 형태로 광대들의 난장 부분이 새롭게 추가가 됐단다.
그런데 이게 또 별미(別美)다.
너무 진중하고 무거운 내용인데 이 부분이 나오면
이야기가 쉽게 정리되면서 오히려 극의 흐름까지도 전화시킨다.
그것도 과하거나 유난스럽지 않게.

개인적으로 이런 한국적이 작품들이 많이 창작됐으면 좋겠다.
대사를 조금 쉽게 풀 수 있다면 이런 류의 작품들은 이방인들에게 엄청 신선하게 느껴질거다.
실제로 이날도 외국인이 꽤 관람하고 있어서 놀랐다.
특히나 한국적인 소재의 작품은 색채와 조명으로도 느낌 전달이 용이해서
여러가지로 impact 줄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라고 했던가?
조산아(早産兒)를 인큐베이터에서 건강한 아이로 키워내듯
이 작품이 좋은 양분과 좋은 지원을 받아 무럭무럭 잘 육성됐으면 좋겟다.
그러면 정말 "꿈꾸는 인큐베이터"가 될텐데!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10. 21. 05:52


일 시 : 2010.10.07 ~ 2010.10.24.
장 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원 작 : 정유정
극 본 : 고연욱
연 출 : 김광보
출 연 : 김영민, 이승주, 이남희, 윤영걸, 손진환, 이용근, 
         문욱일, 박노식, 강   일, 윤다경, 정승길, 권택기, 
         백지원, 최현숙, 김송일, 김순애, 최하영

제 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었던 정유정의 소설 <내 심장을 쏴라>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인데 연극으로 만든다는 소리를 들어 기대하고 있었다.
내년 개봉 예정으로 영화로도 만들고 있다는데...
특별한 느낌을 갖게 했던 건 공연하는 장소 때문이기도 하다.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드라마센터에서 다른과랑 연합으로 철학 수업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졸업하고 거의 10년이 지난 후에 드라마센터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연극을 보기 위해서였는데...
전무송, 전양자, 박상원이 출연했던 <세일즈맨의 죽음>이었다..
그때도 학교는 이미 용인으로 이전했지만 드라마센터 여전한 모습이라 놀랐었다.
그런데 이번에 찾은 드라마센터도 여전히 똑같더라.
로비는 리모델링을 해서 깔끔해보이긴 했는데
극장 내부는 의자가 교체된 것 말고는 별로 바뀐 게 없다.
특히나 로비에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쌀쌀한 날씨에 밖에서 기다리느라 많이 추웠다.
연극도 기대됐지만 오랫만에 모교를 찾은 마음에 구석구석 돌아다녀봤다.
참 많이 변했다.
창작 수업을 듣기 위해 숱하게 오르락 내리락 하던 계단들과
축제때마다 각과의 천막으로 안 그래도 좁았던 뒷뜰(?)이 빽빽해졌던 모습.
또 거기서 전을 부치고 골뱅이를 무치돈 어설픈 모습들이 떠올라 웃었다.
(그때 나 하트 모양 전 부쳐서 팔았는데...)
매점이 있던 자리는 황량해졌고...
하긴 내 추억과 기억도 황량해지긴 했다.
뭐 벌써 20여 년이 다 되가고 있으니...



연극은 출연 배우만으로도 탐이 났다.
무대는 정신병원인 수리 희망 병원 502호
오랫만에 무대에서 보는 김영민이 주인공 이수명으로
신인 이승주가 또 다른 주인공 류승민으로 나온다.
거기다 연극 이(爾)의 연산군 이남희가 최간호사로
"향숙이 이뻤다"라는 대사 하나로 존재감을 드러낸 배우 박노식,
개인적으로는 연극 <짬뽕> 이후에 정말 오랫만에 본 윤영걸,
그리고 손진환, 이용근까지...
어디서 이런 배우들을 다 모았나 싶게 출연진이 좋다.
아마도 김광보 연출의 힘이 컸으리라.
그의 섬세한 연출은 연극계에 이미 정평이 나있다.
거기다가 최상의 콤비라고 불리는 고연욱 극본과의 세 번째 작품.
김광보의 연출은 항상 그렇듯 나쁘지 않다.
애매한 극장때문에 공간을 이용하는데 한계가 있었다는 게 솔직히 치명적이다..
그걸 스크린으로 어찌어찌 대처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조잡한 스크린 때문에 오히려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자주 고민하게 한다.
비전문가적인 소견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벽 전체를 스크린처럼 이용하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다.
페러그라이딩 장면은 극에서 아주 상징적이고 의미있는 부분인데
스크린에 무더기로 날아가다 점점히 사라지는 모습은 너무 작위적이라 보기가 불편했다.
그래도 스크린이 요트 장면에 비하면 이건 양반이다.
솔직히 이 장면은 대략 난감이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열악한 무대 상황을 감안한다면 나쁘지 않았다.
이 연극.
참 극과 극의 평가가 엇갈리는 작품이겠다 싶다.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극 자체가 산만해서 이해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남희가 연기한 최간호사의 어투가 거슬렸을지도.
그런데 나는 최간호사 캐릭터가 너무 맘에 들었고 극에 딱 맞는 어투였다고 생각한다.
사무적이고 변화가 전혀 없는, 시종일관 같은 톤을 유지하는 대사들,
어떻게 보면 첫무대를 선 초보 배우같은 어투기도 하다.
그런데 극의 중간 중간 이 어투들이 아주 살짝 무너질 때가 있다.
대비되는 그 순간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배우 이남희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정말 너무 심하다 싶게 어려 보이는 배우 김영민.
불혹의 나이에 외형적으로 25살의 공황장애 역할이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본인도 이런 얼굴이 한방에 간다고 걱정하던데
나도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도대체 배우 김영민이 언제쯤에 나이가 들어보일지가...
<추적>에 이어 두번재 연극 무대였던 탈렌트 이승주의 연기도 놀라웠다.
기라성같은 연극 배우들 앞에서 제 몫을 너무 잘해내더라.
자칫하면 코믹하고 우습게 보일 것 같은 엔딩의 패러그라이딩 장면도
본인이 워낙 진지하게 연기해서인지 몰라도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딕션과 톤이 좋다.
드라마로 돌아간다면 두 편의 연극이 확실히 그에게 좋은 자산이 되주겠다 싶다.


전부 21명의 배우들이 출연한다.
이 중에 제대로 된 대사조차 없는 배우들이 상당수다.
대사없이도 2시간 동안 계속 정신병자 연기를 해야했던 배우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할만큼 그 모습 자체가 감동적이었다.
연극은 기대했던 것 만큼 잘 나오진 않았다.
결말은 다소 신파적이이고 매우 교훈적(?)이다.
절규하듯 소리지르는 수명의 대사!
"날 쓰러뜨리고 싶다면 내 심장을 쏴라. 그렇지 않으면 난 절대로 안 죽어!"
그래도 이 소설 자체를 연극으로 만든 것 자체가는 정말 장하다.
영화는 모르겠지만 연극적으로 풀어내기가 참 난해했을텐데...
아마도 연출의 힘, 배우의 힘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만약 이 연극에 김영민이나 이남희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객석이 휑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왠지 씁쓸하다.
아무래도 내게도 "트위스트 어게인"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심장이 뛰는 소리!
나도 정말이지 미치게 듣고 싶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