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0. 6. 3. 06:43
오랫만에 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다.
<기록실로의 여행>
사진으로 본 폴 오스터는 마치 사립탐정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의 소설 속에는 사립탐정이 많이 등장한다.
뭔가 확실히 2%쯤 부족한 느낌을 주는...



"폴 오스터"
천상 이야기꾼인 이 사람을 어떻게 할까? (^^)
마치 그동안의 자기 작품들에 대한 참신한 헌사라고 할까?
<기록실로의 여행> 속에는 그가 창조해낸 소설속 인물들이 등장한다.
<뉴욕 3부작>의 피터 스틸먼, 대니얼 퀸 그리고 쇼,
<거대한 괴물>의 벤저민 삭스, <달의 궁전>의 마르코 포그,
데이비드 짐머는 <환상의 책>의 주인공이었고 <신탁의 밤>에 나온 존트로즈까지...
기억을 잃은 "미스터 블랭크"에게 질문하는 것 같다.
"저한테 왜 그랬나요?"라고...
그러니까 "기록실"이란 "미스터 블랭크"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으로 대변되는
스토리텔러 폴 오스터의 머릿속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듯.
소설의 시선을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이다.
재미있고 그리고 독특하다.
소설 속에서 소설의 온갖 기법과 요소들을 뒤엎는 방식.
폴 오스터는 망각의 상태에 있는 "미스터 블랭크"라는 자신의 대용물(?)을 소설 속에 등장시켜
그가 창조한 모든 인물들과 대면하게 만든다.



감시카메라와 미이크가 설치된 방에 살고 있는 미스터 블랭크.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우리는 선생께서 해달라는 데로 해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를 찾아온 의사가 남긴 말과 식사때마다 삼켜야 하는 알약들.
그리고 타자 원고 한 묶음.
원고의 결말을 이야기해달라는 의사 파.

"창조자는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과연 전권을 소유해도 되는가?"
등장하는 인물들을 쫒아가면서 생각하게 되는 질문이다.
소설가가 이런 질문이 화두처럼 주어진다면 막막할텐데
폴 오스터는 이걸 가지고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또 창조해냈다.
무섭다. 이 사람...
이 책을 읽으면 우리가 알앗던 모든 결론들이
어느날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을거난 상상까지 하게 된다.
어쩌면 나도 내 기억 속 인물들에게 
기억하지 못하는 가혹한 짓을 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
폴 오스터의 문학 세계가
느닷없이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어느날,
"미스 블랭크"와 대면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을지도... 
자!, 이제 부실한 기억력을 점검할 시간이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09. 12. 14. 06:12
놀랐다.
<아담이 눈뜰 때>의 작가 장정일이 무려 10년만에 쓴 소설 <구월의 이틀>
그리고 또 놀랐었다.
그가 변한 것 같아서...
그런데 역시 그는 변하지 않았다.
동시에 또 많이 변하기도 했다.
20대 초반에 만난 장정일이란 작가는 내겐 거부감과 동의어였다.
너무나 과감하고 노골적인 성적인 표현이 심한 불쾌감까지도 느끼게 했다.
그의 소설들은 그런 초기의 선입견으로 인해 참 안 읽었다.
그에 반해 그가 쓴 <독서일기>들은 참 잘도 찾아 봤었는데...



금과 은이 은과 금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섬뜩하리만치 무섭다.
결국 정치는 그것을 버리고 문학의 길을 선택하고
작가는 위조지폐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체 신 우익의 정치 의식 앞에 자리를 내준다.
어쩌면 세속 국가이기에 가능한 역할 바꾸기인지도 모르겠다.
"우익청년 탄생기"라는 설정은 오히려 너무나 신선하기까지하다.
읽으면 읽을 수록
재미 이외의 것으로 인해 숨이 막힌다.
이 세기에 대한 조롱이었을까? 아니면 희망이었을까?
노무현 대통령 집권 전반에 대해 작가 장정일은 우익인가? 좌익인가?
복잡해진다.
류시화의 시 <구월의 이틀>을 꼼꼼히 읽어보면 답이 나올까?



대문학이란 "대작가"가 쓴 것이다. 대작가란 바로 "죽은 작가", 곧 작고한 작가를 말한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아라. 죽은 작가들이 다 대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고한 지 몇 백, 몇 천 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우리와 같은 현대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사색의 기원이 되어주는 살아 있는 작가, 죽은 지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고민이나 세계의 곤경을 풀기 위해 찾아볼 수밖에 없는 작가. 그런 작가가 대작가다. 아무리 유명하거나 업적이 탁월하더라도 아직 살아 있다면 그냥 "작가"이고, 좀 더 미안하지만 죽고 나서 점차 잊히기 시작한다면 그 또한 작가다. 요약하자면 작가들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생활"을 시작한다. 살아생전의 작가생활은 호구를 면하기 위한 고통에 불과하지만, 죽는 순간부터 시작하는 제2의 작가생활은 망각과의 싸움이다. 그런 뜻에서 지금 살아 있는 작가들은 진정한 작가생활을 하고 있는 게 아니고, 그냥 호구를 면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죽었으면서도 여전히 작가생활을 하고 있는 작가가 대작가이고, 그런고도 대문학은 절대 옛날 작품이 아니다.



우리가 김대중이나 노무현을 따르는 무리를 향해 "빨갱이"와 같은 인장을 찍어대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에게 논리가 없기 때문이야. 달시 말해 저 인장들은 그들과 더 말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단을 보여주는 것들이지. 그런데 그들과 더 말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단은 바로 우리들이 쓸 수 있는 논리가 풍족하지 않다는 것을 역으로 드러내주는 증거고, 저 인장들이야말로 논리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우리의 탄식이나 같은 거야. 논리로 못 이기니까, 무턱대고 "빨갱이"와 같은 낙인을 찍는 거지. 이미 우리는 이승만 시절부터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말을 사용해왔는데, 그것의 반대말이 "할 말 없는 우파"지. 이처럼 논리에서는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게, 우리들의 한계고 절망이야.
한마디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은 김대중에 이어 연속해서 진보 정권이 들어선 것에 위기를 느낀 보수주의 세력의 사활을 건 총궐기였으며, 노무현 이후 세 번이나 연속해서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다시는 자신들이 발붙일 곳이 없다는 조바심의 발로였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위조지폐범이 된다는 말이야. 그건 죄지. 왜냐하면 도능 중앙은행에서만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야. 돈만 그런 게 아니라 한 국가나 사회에서 통용되는 윤리나 가치, 질서나 신념 따위도 공인되거나 권위를 가진 합법적인 기관을 통해야해. 그런 걸 만드는 곳이 바로 법원이고 학교고 종교지. 기관은 아니지만 전통이나 고전 같은 것도 공인된 가치를 찍어내는 무형의 기관이랄 수 있지. 그런데 작가는 그런 기관에서 만들어내는 것과 다른 가치를 만들어 퍼뜨리는 사람이야. 다시 말해 중앙은행에서 찍은 게 아니라 불법으로 찍은 위조지폐를 유통시키는 사람이 작가지. 일단 나는 그럴 능력이 없어. 게다가 나는 워낙 중앙은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속물이기도 해. 언젠가는 보란 듯이 중앙은행의 총재가 되고 싶지. 위조지폐 따위나 만들며 한평생을 사는 건 좀스러워



(금) : 나는 소설을 쓰겠어. 언젠가 너의 중세의 알레고리였던 "바보들의 배"에 비유해서, 문학을 "패배자들의 배"라고 불렀지. 문학은 세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타는 배나 같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까 말한 국민작가라는 개념으로부터, 나는 문학이란 현실로부터 패배한 자들의 산물이라는 일반적인 솔설은 물론이고 너의 위조지폐범론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발견했어. 그건 네가 하려는 정치보다 보잘것없거나, 힘이 없는 게 결코 아니댜.

(은) : 나는 배의 바닥짐 같은 사람이나 가치를 좋아해. 바닥짐을 싣지 않으면 강한 바람이나 큰 파도에 휩쓸려 난파할 우려가 커. 그래서 멈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반드시 바닥짐을 싣고 다녀. 바닥짐이 없으면 배가 침몰하는 것처럼, 보수가 없으며 국가나 사회도 뒤집어져. 그래서 나는 보수주의자가 됐어.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5. 25. 14:52

<유진과 유진> - 이금이

 유진과 유진 (푸른도서관 9)

지독한 공황상태에 빠져있었던 주말이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투신 자살이라니....
또 다시 아픈 대통령의 역사를 소유하게 된 우리들.

그 소유에 대한 책임을 어쩌면 우리는 사는 내내 생각하고, 오래오래 갚아나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라도 벼랑 위에 서면 어쩔 수 없이 그 아래를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걸 또 잊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이 많았고, 두서없는 생각들로 맘이 무거웠고, 그래서 지독한 두통까지도 감수해야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상처”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제 맘에 수 없이 많은 상처를 내고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의 반복이라는 생각.

그 치료의 방법이 극복이든, 해방이든, 혹은 망각이든,

어째든 우리는 소망합니다.

단지 “파괴”만은 아니기를......

추락을 꿈꾸는 아니 지금 추락하고 있는 사람이 말합니다.

“아직은, 아직은 괜찮아! 문제는 그 다음이야!” 라고...

추락하는 중에는 오히려 평온할 수 있습니다. 허공 속에 자유를 느낄 수도 있겠죠.

그 다음은.....

잠시 후, 고된 몸이 드디어 바닥에 닿게 되는 그 다음은...


유진과 유진!

같은 유치원을 다닌 두 아이는 유치원 원장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합니다.

같은 성(姓)과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아이,

중학교 2학년이 된 그들은 다시 한 반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작은 유진은 큰 유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네요.

혹시 이 아이 동명이인일까요?


이 책은,

동화작가로 유명한 이금이가 쓴 청소년 도서입니다.

참 아프고 심각한 내용이죠. 더군다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딸”을 둔 세상 모든 “엄마”들이 두려워하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죠.

우리처럼 이미 다 큰 사람들의 눈에 이 소설은 분명 별 재미없어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시사성 강한 고발의 대사가 있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밋밋한 상황처럼 느껴질지도요.(이미 우리는 현실이라는 임펙트 강한 실제상황을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까요...)

단지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상처”를 바라보는 그리고 치유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깁니다.

성폭력을 당한 아이,

그 아이를 당신은 어떤 눈으로 보시겠습니까?

“깨진 그릇!”

그래서 살던 동네를 떠나 아무도 모를 거라 믿는 곳으로 피난을 가게 만드는 시선?

겨우겨우 피해 달아났는데 시간이 지나 그 사실을 알게 된 누군가가 이야기합니다.

“그런 경험을 가진 아이는 문제가 있다”

우르르.... 한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네요.

그러나 이 말은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그런 경험을 가진 아이는 나에게 문제가 된다!”

이런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만든 그런 아이는 신화 속 이카로스가 되어 어깨 위로 날개를 펼칩니다.

오직 상처로만 만들어진 날개를 단 이카로스...

태양을 향해서 녹아버릴 밀랍날개를 달고 더 높이높이 날아올라야만 하는 내가 만든 그런 아이......

그 아이의 추락을 같이 지켜보시겠습니까???


누군가를 비난하고 손가락질 할 때,

우리는 비난의 자유를 생각하기 이전에, 비난의 책임부터 먼저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내 입에서 시작되는 것들에 대한 책임!

내 말이, 내 시선이 누군가의 육체를 순식간에 무너뜨려 그 형체조차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

우리는 지난 주말에 또 하나의 사례를 갖게 된 셈이네요.

종이인형!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종이인형을 기억하시나요?

한 장의 종이 위에 그려진 예쁘고 화려한 드레스와 외출복들, 어깨에 달린 조그만 접이를 넘겨 하나하나 종이 인형에 입혀줬던 기억.

그렇다면 그것도 기억하시나요?

예쁜 인형과 화려한 드레스를 뒤집어 보면

그 뒤엔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


누군가 내 뒷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내내 마음이 섬뜩하네요...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