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0. 8. 16. 06:44

예전에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구 문예회관)에서 공연을 기다리다
노천카페에서 황석영씨가 인터뷰하는 모습을 봤었다.
신간이 나오나 보다 생각했는데 그 책이 바로 이 책 <감남몽>이었던 듯.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황석영씨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라서)
그때 놀랐던 건 황석영씨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거였다.
뭔가 촬영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저 늙은 아저씨는 누구지? 하는 얼굴로 쓱 지나치면서 가더라.
나는 그 옆에서 한참을 두근거리며 부끄럽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황.석.영.
처음 알게 된 건 초등학교 때 오빠가 가지고 있는 책을 통해서였다.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인 것 같은데 제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사람 빨갱인가?" 어린 마음에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책의 내용은 무지 어려웠지만 건성으로 읽으면서도 왠지 대단한 사람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뭘 좀 알게 된 뒤로는 그의 책은 정말 열심히 찾아서 봤다.
얼마전에는 프랑스 르몽드지가 그의 소설 <심청>을 여름 휴가지에서 읽어야 할 문학도서 1위로 꼽기도 했다.
한국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말이다.



최인훈와 함께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는 작가 황석영.
황석영이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참 재미있고 통쾌해서 그대로 옮겨본다.
"내가 관심 없다고 열 번 넘게 얘기했어요. 노벨문학상이 월드컵도 아니고, 100미터 달리기도 아니고…. 내가 무슨 행동을 하면 노벨상 받으려고 그런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서 짜증이 나요. 노벨상은 서구에서도 가치가 움퍽질퍽하잖아요. 동양문화나 동양문학에 대한 오해도 있어요. 이건 농담입니다만, 만약 주면 멋있게 거절 한번 해볼까요? 아니, 이런 말도 오해를 불러일으킬라. 나에게는 독자가 사랑해주는 것이 가장 큰 상이에요."
1943년 만주 창춘(長春)에서 태어난 황석영은 해방 후 평양을 거쳐 월남, 영등포에 정착한다.
경복고를 자퇴하고 1962년 '사상계'에 단편 <입석부근>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해병대에 입대해 2년간 베트남전에도 참전했고(1967~1969년),
해남·광주에서 현장문화운동을 하다가 광주항쟁을 겪고 그 진상을 세상에 알리는 활동도 했다. 
1989년에는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초청으로 방북,
그 사건으로 5년 동안 베를린, 뉴욕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내가 초등학교때 멋모르고 읽었던 책이 이 사건과 관계된 책이었다)
1998년 귀국해 5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황석영을 떠올리면 파란만장하기도 하고, 대담한 청춘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얼마전에는 강호동의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입담을 자랑하기도 했었다.
주변에서는 주책이라고 말렸단다.
지금 그는 트위터의 세계에 빠져있기도 하니 확실히 나보다 청춘인 건 분명하다.
(이 책 <강남몽>도 인터넷 연재소설이고...)
그는 당신의 일련의 활동(?)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작가가 세대장벽을 부수고 사회적 금기를 깨뜨려야 문화의 숨통이 트입니다." 라고...



"이 소설을 정의한다면 한마디로 우리의 욕망입니다."
소설 <강남몽>의 내용 80%는 거의 사실이라는데 실제 읽고 있으면 다큐나 역사서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일부러 문체도 딱딱 끊어서 썼단다.
<강남몽>은 1995년 6월 강남의 상품백화점 붕괴사건을 소재로 쓰여졌다.
(소설에서는 상품백화점이 대성백화점으로 나온다)
1,500여명의 사상자를 냈던 삼품백화점 사건은 당시에 모든 뉴스를 도배했었다.
멀쩡하던 건물이 한 순간에 폭싹 무너져내리던 참상을 목격하면서
분노하기에 앞서 어이없기까지 했었다.
저런 일들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었다.
(그 일 년 전에는 성수대교가 붕괴되면서 꽃같은 학생들의 희생을 목격했었는데...)
그런데 그 참혹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기적같은 사람들이 그래, 있,었,다.
그 기적같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한국의 근대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강남을 중심으로 "몽(夢)"을 쫒아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인간 군상들.
그 안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과 치부들을 들여다보는 건
추잡하고 아픈 시간이었다.
한국의 근대사를 이렇게 노골적이고 정직하게 쓸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처음에 제목만 들었을 때 황석영의 글쓰기가 좀 달라졌나 싶었는데  
역시 황석영의 소설이다.
그리고 황석영이기에 쓸 수 있는 그런 역사이기도 하다.

1장 백화점이 무너지다
2장 생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3장 길 가는 데 땅이 있다
4장 개와 늑대의 시간
5장 여기 사람 있어요 


화류계 마담에서 재벌의 후처가 되었다가 무너진 백화점에 깔리는 박선녀(1장),
일본군 밀정과 해방 후 미군 정보요원을 거쳐 얻은 권력과 정보로 강남의 대형 백화점 회장이 되는 김진(2장),
강남 부동산 사업가 심남수(3장),
강남 폭력조직 두목 홍양태와 강은촌(4장),
백화점 지하 매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임정아(5장).
각 장의 주인공의 이야기는 강남 개발과 한국 자본주의 근대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제 일물들(김구, 박정희, 김재규)을 그대도 쓴 부분에서는 역사 속의 진실을
이름을 한 글자씩 바꾼 인물들의 모습에선 묘한 비꼼과 폭로가 담겨져 속이 다 시원해진다.
깡패 홍양태 - 조양은, 강은촌 - 김태촌,
80년대 사채시장의 큰손 이희철 - 이철희, 장영숙 - 장영자,
특무대장 김창수 - 김창룡...
이들이 개인적인 욕심과 이기심으로 시작된 게 정말 "강남몽"은 아니었을까?



황석영이 서술해낸 "강남형성사"는
허구가 아닌 사실이기에 더 긴장감있고 생생하다.
그의 말대로 마치 "꼭두각시놀음"을 떠올리게 한다.

..... 꼭두각시 인형 같은 캐릭터들이 남한사회의 욕망과 운명이라는 그물망 속에서 서로 얽혀서 돌아가고
그러면서 모르는 사이에 역사가 드러나게 하면 어떨까.
나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차례로 무너지던 1995년 무렵을 일단 정치적으로는 형식적 민주주의 시대의 출발로, 경제적으로는 개발독재가 종언을 고하면서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 재생산구조를 갖추게 되는 시기로,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으로 지식인의 머릿속에서만 형성되어온 민중이 걷잡을 수 없는 소비사회의 적나라한 대중으로 휩쓸려들면서 욕망이 얽혀가는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바로 그즈음에서 시작하여 거꾸로 현재의 삶을 규정하는 최초의 출발점을 향하여 거슬러올라간다  ......


그러면서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사람살이가 어쩌면 꿈과 같이 덧없는 가상의 현실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강남몽(夢)"이라고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아니 이 모든 근대사가
우리에겐 정말 몽환이고 꿈이었을까?
쓰는 사람의 어깨도 묵직했겠지만 읽는 사람의 어깨 역시나 묵직해지는 글이다.
그래, 삼풍백화점 사건은
탐욕과 욕망이 만들어낸 근대사로 비롯된
뼈아픈 상처이자 역사임에 분명하다.
무너진 건 단지 건물 뿐이 아니었다...
어쩌면 아직도 균열이 멈추지 않아 또 다시 무너지게 될지도...
붕괴 속에 우리는 이제 무엇을 묻게 될까?
그리고 누가 또 다시 살아 남아 돌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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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석영은 이 책을 사회의 중추인 넥타이 부대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필독서로 읽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인다.
우리의 근대사를 되집으며 현대사를, 미래사를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근대사를 마친 황석영은 지금 다른 이야기를 또 구상중이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예술성 짙은 경장편을 쓰려고 한단다.
<강남몽>과 함께 오래 구상해온 영등포 이야기인 <철도원삼대>라는 제목의 소설도 쓸 예정이고..
개인적인 욕심이긴 하지만
두 작품 모두 빨리 만나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의 소설은 내겐 또 하나의 개안(開眼)이기에...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