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0. 5. 4. 05:52
이권우의 서평집 <죽도록 책만 읽는>이란 책에서 소개된 책이었다.
짧은 소개만으로도 한 번 읽어봐야겠구나 생각했던 책이다.
1071년생.
나와 비슷한 나이를 가진 사람이 쓴 농촌 이야기...
동시대에 태어나고 자랐지만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에 가까운 세계, 농촌.
나는 혹시 이 책장을 펼치면서
양촌리 전원일기의 인자한 김회장이나 수다스런 일용엄니를 만나게 될거라고 기대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 속엔 양촌리 "전원일기" 같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양촌리 김회장은 진정한 현실에서는 없는 것처럼...
모내기 블루스  / 노래를 못하면 아, 미운 사람 / 윷을 던져라 / 언론낙서백일장
서점, 네시 / 당구장 십이시 / 서울, 눈 거의 내리지 않음 / 열쇠가 없는 사람들 / 배신
9편의 단편들은 하나 같이 구질구질하고 그리고 심지어는 조금씩 불쾌하기까지 하다.
마치 막걸리에 불콰하게 취한 사람이 바로 옆에서 쉰내 나는 트름을 연거푸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그 불쾌함은 피폐된 농촌 현실과의 적나라한 조우에서 오는 불쾌함이기도 하다.
어차피 매일 한술의 밥을 입 안에 밀어넣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건 다 마찬가진데...
"유전무죄, 무전유죄"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이 말이
이제는 농촌의 실정과 딱 맞아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깔깔한 쌀을 씹듯 씁쓸하다.
입 안에 쌀을 넣을 쌀을 위해 사는 사람이
그 쌀을 키우는 사람에게 이런 측은하고 가여운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게
어쩐지 영 불편하고 송구스럽다.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그냥 재미만으로 읽고 넘어가기에
묵직한 대목들이 너무 많다.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닌 현실을 목격해야 하기에...
읽는 동안 박장대소를 하긴 하지만 어쩐지 뒤가 구려 자꾸 멈칫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렇게 만들었냐?"하며 대거리를 하고 싶어지지만
사실을 따지자면 내가 안 그런 것도 아니니까 할 말이 더 없다.
잰장!
대놓고 훈계하는 소설보다 이런 글을 읽을 때가 더 바늘방석같다.
엉덩이를 지나 온 몸이 따끔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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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도 인터넷으로 고객관리하는 21세기 세상에, 농촌은 이게 뭐래?"
"새천년의 현실이다. 이십일세기는 가는 놈들이 가는 거구, 우리 같은 놈들은 죽기 전에 십구세기를 면할라나도 물러" - 모내기 블루스

한탕주의란 어떤 사조를 가리키는가.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던 사상. 민주주의보다도, 마르크스주의보다도, 자본주의보다도, 그 어떤 사상보다도 위대했던 사상. 그러나 그 누구도 사상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상, 엄연히 확실히 핵폭탄 급수의 장악력으로 늘 존재하면서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사상, 하지만 거의 누구에게나 있는 사상, 지극히 간단히 말해서, 말 그대로 한탕해서 모든 것을 만회하거나, 혹은 이후의 모든 것을 마련하자는 사상. - 언론낙서백일장

...... 3차 과정은 지극지긋했던 '학교 다니기'였다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도합 16년 동안 학교 다니기 훈련을 받았다네. 대학원이나 해외유학이라는 시설을 갖춘 신병 훈련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는데,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내가 있던 훈련소에는 재정이 모라자 그런 시설은 없었다네, 물론 내가 있던 훈련소보다도 재정상태가 불량한 훈련소도 있었다네. 거의 드문 경우로는 중학교나 고등학교 시설이 없는 훈련소가 있었고, 흔한 경우로는 대학교 시설이 없는 훈련소가 있었다네.
그리하여 16년에 걸친, 길고 긴 학교 다니기 훈련이 끝나고 드디어 나는 군인의 자격을 얻었는가 싶었다네. 내가 배치될 부대는 어디일까, 설레기도 하면서, 초조하고 불안하기도 하면서 말이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네. 4차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네
4차 과정은 모든 훈련소가 다같이, 재정에 관계없이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실시하는 훈련이라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다네. 모든 훈련소는 그 훈련과정을 운영하는 데 단 일원의 경비도 투자할 필요가 없었다네. 어느 훈련소의 경우에는 직원들조차 없었다네
살기 훈련, 그것이 4차 과정이었다네. 죽는다는 것이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산다는 것은 밥을 먹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네. 4차 과정은, 살기, 다시 말해서 밥먹고 견디기였다네. - 당구장 십이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사는 사람들을 신뢰할 수가 없어요. 김지하 선생님의 오적들만큼,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산 놈들이 또 있습니까? 때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산다는 건, 위험합니다.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삶이 때로는 타인에게 억압과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단 말입니다. 열심히 사는 삶보다, 옳은 방향의 삶이 더 중요하단 말입니다. 옳은 방향의 삶이 아니다 싶을 때는 차라리 열심히 살지 않는 게 낫습니다.

몇 줄의 글로써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을 가둬둘 수 잇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글의 오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글은 숙명적으로 사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육십평생을 육체노동에 종사해왔는데, 그의 아들은 육체노동이라면 겁부터 내"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면, 아버지처럼 농부가 되었을까? 아니다, 아버지처럼 농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자본주의 논리가 가장 안 통하는 곳, 농촌, 그곳에서 아버지처럼 살기는 싫었다.

우리는 서울에서 개겨야 돼. 그게 농촌 출신들의 숙명이야. 대학 나온 우리가 농촌에서 뭘 할 수가 있지? 어떻게서든 서울에서 살아남아야 돼. 우리가 개겨볼 데는 서울밖에 없어. 서울만이 우리에게 관대하지 - 서울, 눈 거의 내리지 않음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