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6. 3. 11. 08:16

당장 읽을 책이 없기에 손에 잡은 에세이였다.

일단 제목은 별로였고, 표지는 맘에 들었고...

책을 쓴 작가가 "이석원"이라고 되어 있길래

설마 내가 아는 "언니네 이발관"의 "이석원"은 아니겠지 했는데 그 "이석원"이 맞더라

그래서 놀랐다.

그 다음엔 글을 너무 잘써서 놀랐고.

마지막으로 마치 내가 쓴 글 같아서 또 한 번 놀랐다.

 

..... 나도 그런 아이 중 하나였다. 무엇이 되고 싶다거나 뭘 해보고 싶은 게 도무지 없어서 늘 괴로웠고, 또 나만 그렇다고 생각해 자책했다. 난 스스로를 아메바처럼 여겼다. 내가 했던 일이라곤 버스를 타고 몇 시간 동안이나 할 일 없이 시내를 돌다가 종로에 내려 교보문고를 가서는 할 일도 살 책도 없으면서 미기적거리다 오는 것이 전부였다. 이게 뭔가 얘기가 되려면 그때 그곳에서 엄청난 책을 독파하여 마침내 꿈을 실현했네, 교보문고는 내 꿈의 자양분 어쩌구... 뭐 이래야 도겠지만 미안하게도 그런 것은 전혀 없다. 그곳은 내게 그저 비와 햇볕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 나무 그늘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소중했지만 .....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때부터 방학이 되면 제일 많이 갔던 곳이 교보문고였고

내가 버스타고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도 교보문고였다.

이석원과 내가 비슷한 나이니 어쩌면 우린 교보문고에서 서로 스쳤을 수도 있겠다.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책에 빠지게 됐다는거.

그러니까 책은 아주 어릴때부터 내겐 구원이자 피난처였다.

2남 3녀의 넷재딸은,

존재감이라는 눈꼽만큼도 없어서 뭘 해도 티가 나지 않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도 뭔가 티가 나는 행동을 할 생각도 없었다.

대가족 속에서 "혼자"라는 공간을 소망했고

그걸 "책"이 가능하게 해줬다.

책만한 쾌속정이 없다는 에밀리 디킨스의 말은 정말 진실이었다.

 

 

...... 책읽기. 그것은 내 인생의 혁명적인 변화였다. 책을 익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를..... 남의 삶을 엿보고 남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남의 상상을 맛보는 이 무서울 정도의 희열과 쾌감이 어째서 이제야 나를 찾아왔을까. 이제 막 발을 딛기 시작한 이 미지의 세계는 정말로 나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나는 두려움과 호기심 속에 점점 책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

 

뒤늦게 책에 빠진 이석원의 고백은 내 마음과 정학히 일치한다.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손목을 그어도 벌써 여러 번 그었을거고,

약을 털어넣어도 여러 번 털어넣었을거다.

책이 없었다면 나는 방향감각도 없이 낯선 곳을 서성이고 있었을거다.

나는 책의 보호를 받으며

매일 아침 깨어났고, 

매일을 살아냈고,

그렇게 매일 회복됐다.

이석원은 자신을 "보통의 존재"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석원이 모르는게 하나 있다.

"보통의 존재"가 정말 "보통의 존재"가 아니라는걸.

general 혹은 normal.

그 근처만 가도 좋겠다며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기에 언니네 이발관 이석원은 정직하게 말해 general 하지 않다.

비록 그가 엄청난 팬덤의 중심에 있는 인기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책이 출판된게 2009년이다.

그렇다면 그 안의 글들은 교정과 편집의 과정이 짧지 않았을테니

적어도 2009년보다 훨씬 전에 쓴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그걸 생각하니 뮤지션 이석원이 아닌 인간 이석원이 이해됐다.

그리고 혼자 그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다독였다.

 

이석원이 많이 부러웠다.

나는 아직까지도 보통의 존재가 되기 위해

이토록 절박하게 기를 쓰고 있는데...

 

보통의 존재.

어렵고

그리고 참 멀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