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2. 6. 18. 08:32

<그을린사랑>

 

일시 : 2012.06.05. ~ 2012.07.01.

장소 : 명동예술극장

원작 : 와즈디 무아와드

연출 : 김동현

대본, 드라마투르기 : 배삼식

작곡, 음악감독 : 정재일

출연 : 이연규, 배해선, 남명렬, 백익남, 이윤재, 박성연, 김주완

        전박찬, 이진희, 이다아야.

 

이 연극을 대해 과연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연극이 아니라 고통스런 역사이고, 처참한 고발의 르포이자 그리고 처절하고 사실적인 다큐다.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한 작품이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고귀하고 장엄하고 웅장해서 황홀했다.

연극을 보고 한동안 복기(復記)조차 엄두도 못 낼 만큼 황폐하고 황량했다.

그래, 나는 이 연극에 완벽히 압도당했고 그래서 결국 오래 침묵했다.

나는 나왈의 침묵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노라 감히 말하련다.

무대에 우뚝 솟은 몇 개의 구조물을 보면서 나는 아주 오래전 역사를 기록해 우뚝 세워논 오벨리스크를 떠올렸다.

그들만의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선택된 소수의 사람에 의해서만 온전히 해독할 수 있는 묵시록적 언어.

그건 일종의 금기이자 경고이기도 하다.

"우리 함께 있으니 모든 게 나아질거야"

5년 동안 긴 침묵으로 일관했던 나왈의 죽기 전 내 뱉은 문장.

이 문장이 화인(火印)이 되어 작품의 모든 여정은 시작된다.

시간을 되밟는 여정,

과거를 추적하는 여정,

그리고 결국 너무나 끔직하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나의  기원,

나의 태(胎)을 찾아가는 여정.

 

나왈의 유언장이 쌍둥이 남매 시몽과 잔느에게 공개되는 날,

유언집행인은 남매에게 두 장의 편지와 함께 다음과 같은 유언을 전했다.

잔느에게는 너희들의 아버지를 찾아 편지를 전할 것을,

시몽에게는 너희들의 형을 찾아 나머지 편지를 전할 것을.

그 두 장의 편지가 아버지와 형이 읽게되면 또 다른 한 장의 편지가 공개될거라는 단서와 함께...

단 한 번도 어미로써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던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들은 남매는 혼돈에 빠진다.

지금껏 죽은 걸로 알고 있었던 아버지와

그리고 존재 자체도 몰랐던 형을 찾으라는 유언.

 

여자는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기꺼이 전사(戰士)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족의 역사가,

그 가족의 기원이 깊고 완강한 침묵이 될 수밖에 없다면?

남겨진 사람은 이제 선택을 해야한다.

금기를 깨부수고 침묵에 정면으로 소리를 치든지

아니면 더 깊고 오랜 침묵 속으로 숨어버리든지...

 

두 장의 편지는 남매에 의해 그들의 아비와 그들의 형에게 전달된다.

두 사람은 기원을 찾는 방정식을 풀었다.

1+1=2가 아닐 수 있다는 수학의 명제.

너무나 뻔한 명제가 뒤집힌 것처럼 충격적이고 잔인한 진실과 그들 모두는 대면중이다.

그들의 아비가 바로 그들의 형(오빠)이고, 

그들의 형(오빠)이 바로 그들의 아비라는 진실.

이 모든 게 과장이라고, 단지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지 말자.

명예살인과 부계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같은 나라라도 부족간의 생사를 거는 싸움이 난무하는 곳.

그곳에서 지금 일어나는 있는 일들은 이 사건보다 더 충격적이고 극악무도하다.

우리는 이 재앙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이 금기를 무엇으로 깨부술 수 있을까? 

나왈은 근원적인 "사랑(모성)"에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사랑이 있는 곳에 증오는 있을 수 없다!"

비록 태를 끊는 순간 바로 난민촌으로 보내졌던 아이였지만 아기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나왈은 맹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널 언제나 사랑할거야!"

애타게 아들을 찾아다닌 나왈.

25년이 훌쩍 지나 드디어 두 사람은 재회하게 된다.

그러나 잔인하게도 그 둘은 서로의 태(胎)를, 서로의 근원을 알아볼 수 없었다.

포로로 잡힌 어미 나왈은 고문기술자로 불리는 자신의 아들에게 강간당한다.

그 후에 태어난 쌍둥이 아이...

 

이다아야. 배해선, 이연규가 연기한 나왈은

처음엔 순수했고, 나중엔 강인했고, 그리고 마지막엔 비장하고 웅장했다.

특히 이연규 나왈의 법정 장면과 편지 장면은 너무나 압도적이라 보는 내내 너무 비참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 숨통을 조이는 느낌이었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극도의 공포심까지 느꼈다.

참담함. 참담함. 참담함.

그러나 드디어 개봉된 마지막 편지.

나왈은 쌍둥이 남매의 아비이자 자신의 아들에게 말한다.

"넌 사랑으로 태어났다. 그러니 네 동생들도 역시 사랑으로 태어났다 .... 사랑이 있는 곳에 증오는 있을 수 없다"

용서와 이해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선명하고 잔인하다.

그러나 여기에 누가 감히 정의를 운운하며 비난의 말을 퍼부을 수 있을까?

(정의는 개나 물어가게 놔두라지!)

누구라도 그럴 순 없다!

이건 비극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니까.

 

작품 전체를 관통하던 현과 건반을 읽으며 여러 번 감탄했다.

(음악감독 정재일에게도 깊은 찬사를...)

격정적이고 비장한 현의 울림.

땔로는 밝은 종소리로, 때로는 웅장함으로 극의 간극을 채웠던 건반의 떨림.

전쟁의 참상을 떠올리게 하는 아득한 포탄소리.

귀기(鬼氣)가 느껴지갸ㅔ 섬득하면서도 아름다웠던 구음(口音)들.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르르 떨어지던 모래와 그 모래를 적시던 물.

거대한 구조물에 투영된 의미 심장한 영상들.

보도 듣는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의미였고, 하나의 진언이었고, 하나의 진혼곡이었다.

보고난 후 오래 아팠고 힘들었다.

나는 내가 본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해서든 제대로 기록해낼 수 없을테다. 결코!

 

* 10명의 배우 모두에게 한 순간도 경의를 표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가장 아름답고 위대했다.

   그러니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 강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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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끄적 끄적...2012. 5. 18. 05:46

  

<빈터(更地) - sarachi>

 

일시 : 2012.05.09. ~ 2012.05.12.

장소 :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출연 : 남명렬, 이정미

극본 : 오타 쇼고(太田省吾)

연출 : 이지영

제작 : 극단 소금창고

주최 : 서울연극협회

 

2012년 서울연극제 초청작 <빈터>

이 연극은 <물의 정거장>, <모래의 정거장>의 작가 오타 쇼고(太田省吾)  작이다.

오타 소고는 극단적으로 느린 등장인물의 움직임을 부각시킨 "침묵극"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겸 연출가란다.

 

집이나 건물이 허물어지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빈터"를 뜻하는 일본어 "사라치(shrachi)"

고배 대지진 이후에 일본에서 유행처럼 던진 화두의 단어가 바로 사라치란다.

1992년 일본에서 초연됐고 2000년 서울 연극제에서 초연될 때 오타 쇼고가 직접 내한하기도 했었다.

초연의 배우 남명렬이 또 다시 남편으로 무대에 올랐다.

<바다와 양산>에서 아내 역을 했던 이정미와 함께. 

 

연극은...

극도의 침묵과 느림이 주는 낯섬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가.

"sarachi"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빈터라는데

실제 무대 위에는 싱크대, 변기, 콘크리트 벽돌 같은 것들이 집의 흔적들이 일렬로 나열되어 있다.

삶의 흔적, 혹은 이야기의 편린들인가 싶었는데 딱히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무대는 결국 커다란 천으로 그야말로 황량한 빈터가 된다.

현실이었을까?

어쩌면 이 부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승도 저승도 아닌 어떤 곳.

두 부부의 기억이 머무는 그곳에서 부부는 일생을 반추한다.

갓난아기때부터 사춘기 시절 연애이야기, 그리고 아이들 이야기.

 

솔직히 작품은 난해하고 많이 어려웠다.

극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난감해서 어쩔 줄 몰랐다.

때때로 너무나 몽환적이고 고요해서 까무룩 잠이 들 것만 같았다.

(실제로 눈이 감겼던 것도 같다)

sarachi.

결국 모든 게 사라지고 남는 건 빈터다.

그러나 그 비어있는 공간, 텅 빈 폐허 속에는 인간의 모든 이력이 남아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 이력위에서 또 다른 이력을 시작한다.

그래서 모든 빈터(폐허)는 신생(新生)의 터전이 된다.

혹 그런 의미였을까?

자신의 빈터에서 모든 게 다시 시작된다고...

그러니 반추하라고!

 

남명렬, 이정미 두 배우의 역량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내내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름답고 성실한 두 배우에게 존경심을 담은 감사를 보낸다.

 

나는 아직 멀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2. 5. 7. 06:07

<그리고 또 하루>

 

부제 : 혹시, 빛고래를 본 적 있어요?

일시 : 202.04.25. ~ 2012.04.29.

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춮연 : 남명렬, 이지현, 이화룡, 이지현

극작 : 최명숙

연출 ; 안경모

제작 : 극단 연우무대

주최 : 서울연극협회

 

오랫만에 연극배우 남명렬을 무대에서 만났다.

지난 1년 동안 그는 개인적으로 작품을 좀 쉬었다고 했다.

여러 의미로 이 작품이 쌍방간의 숨통인 샘인다.

물론 이 작품 전에 아주 짧게 두어 작품이 공연되긴 했지만 나는 보지 못했기에 숨을 수지 못했다.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 끝에 만난 작품은 긴 공백의 여운을 성실히, 그리고 차곡차곡 채워 졌다.

무인도에 갇힌 한 쌍의 남녀.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분신같은 또 다른 한 쌍의 노인과 소녀.

노인은 마치 자신의 자서전을 퇴고하듯 천천히 길고 긴 양피지의 글자를 읽는다.

양피지는 흘러넘쳐 남자와 여자가 떠 있는 섬의 바다와 닫아있다.

작품은 특이했고 등장하는 네 배우들의 연기는 미안할만큼 성실하고 진실했다.

저 사람들에게 저 말도 안되는 환경을 현실로 공감하면서

그 시간들을 몰래 들여다보는 행운을 오랫만에 누렸다.

나른하고, 몽환적이고, 그리고 실존적인 시간이 흐르는 곳, 흐르는 날들의 이야기.

"그렇게 또 하루가 갔다"

문득문득 그 시간들을 손으로 꼽는 나는 발견한다.

 

꾸준히 성실한 극단 연우무대의 60번째 정기공연작 <그리고 또 하루>

이 작품은 2012년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작이기도 하다.

난해한 작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고 편안한 작품도 아니다.

이 작품은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며,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다.

그리고 꿈과 현실의 이야기며, 벗어남과 머뭄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다 결국 모든 게 합쳐져서 바다로 나아간다.

남명렬의 목소리와 연기는 바다처럼 아득하고 잔잔했고

작은 이지현의 목소리는 그 바다 위로 떨어지는 햇빛처럼 찬란하고 명쾌했다.

이화룡과 또 다른 이지현은 남녀는 바다 위의 날씨처럼 때로는 광폭하고 때로는 처연하고 또 때로는 무심했다.

배우 오화룡은 이 작품에서 처음 봤는데 놀랐다.

따뜻하고 듣기 좋은 음성을 지녔다.

적어도 이 작품 속에서 그의 연기는 적절했고 성실했다.

작품을 이해하고 배역을 사랑하는 사람이 갖는 깊이와 눈빛이 아름답다웠다.

눈과 몸짓이 맑다.

맑은 눈과 맑은 몸의 언어를 가진 배우의 이력은 아마도 수월하지 않을 것이다.

막막한 걱정과 안도가 무인도처럼 저기 저만큼에서 외따로 떠있다.

피아노 소리.

이게 없었다면 아마도 이 작품은 조금 더 힘든 작품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나이 든 남자가 그녀와 비슷한 여자를 보고 말을 거는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작품은 전체적으로 참 좋았다.

좋은 배우들의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래서 짧은 공연기간이 아쉬움으로 남는 그런 작품이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11. 13. 05:54

연극 <프루프>

장 소 : 대학로예술마당 3관
기 간 : 10월 12일(화)~12월 12일(일)
극 본 : 데이비드 어번

연 출 : 이유리
출 연 : 로버트 - 남명렬, 정원종, 
         캐서린 - 윤지, 강혜정 
         클레어 - 하다솜, 김태인
         해롤드 - 김동현



나무 액터스와 악어 컴퍼니의 야심작(?)
"무대가 좋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자
타블로와 결혼 후 아기를 낳고 한동안 쉬고 있던 강혜정의 복귀작 연극 <프루프>
그러나 난 이윤지 캐서린을 선택했다.
2 년 전에 김지호와 남명렬이 부녀로 나왔던 <프루프>를 보면서 그 느낌이 얼마나 좋았던지...
그때 이 작품을 보면서 김지호가 나이가 좀 더 어렸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었다.
김지호 자체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연기를 잘했었고 집중력도 놀라웠었다.
단지 그녀가 25살로 나오는 게 나홀로 어색했었는데...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윤지의 캐서린을 선택한 건.
그리고 왠지 그녀는 똑 부러지고 야무지게 연기를 할 것 같았다.
아버지 로버트역은 전혀 망설임이 없이 배우 남명렬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무대 위에서 존재감 있다는 표현,
배우 남명렬만큼 적절하게 들어맞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의 딕션과 톤은 가히 환상적이다.
연극을 보는 내내 나는 로버트가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사실에 불같이 질투가 났다.
(이게 말이 되느냐 말이다)



천재 수학자 로버트는 20대에 이미 학계가 깜짝 놀랄 수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천재성이 오히려 그에게 견디기 힘든 독이었을까?
말년은 정신분열 증세와 불안장애로 혼란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캐서린의 보호를 받으며...
아버지의 수학적인 천재성을 물려받은 캐서린은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학업도 포기한다.
...... 캐서린은 분명 내 삶을 구원해주었다. 
       그 아이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결코 그 아이에게 보답하지 못할 것이다 ......

캐서린의 21살 생일에 쓴 로버트가 일기.
문득 두 부녀의 관계에 또 다시 질투가 난다.
로버트에게 딸 캐서린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리고 연극은 우리에게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우울증마저도 너무나 수학적인 딸 캐서린,
아버지 로버트는 혼자 남겨진 그 딸에게 환영으로라도 나타나
새 삶을 시작할 힘을 남겨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겟다.
네 삶에 새로운 삼페인을 스스로 떠뜨리라고...
스스로를 죽은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퇴장하는 아버지의 탈육체화된 모습을 보면서
난 그 어떤 실체보다 더 현실적으로 만져지는 로버트의 존재감를 느꼈다.
마지막 유산, 혹은 찬란한 유산이라는 식상한 표현이라도 꼭 해야할 것 같다.
부재가 분명한 한 사람이 버젓이 현실로 변하는 그 시점.
아버지는 딸에게 모든 걸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늘 모녀관계에만 익숙했는데 무대에서 만나는 부녀관계는 참 뜨겁고 사랑스럽고
그리고 안타까움의 연속이었다.
부녀의 사랑은 할과 캐서린의 사랑마저도 유치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캐서린과 클레어의 관계까지도.
캐서린은 정말 그랬을까?
아버지의 천재성이 가장 번득이던 20대 중반,
지금 그 나이를 지나야 하는 자신에게도 혹시 아버지의 정신병이 유전되는게 아닐까 불안했을끼?
작품 속에서는 그런 뉘앙스가 아주 많이 풍기지만
난 결코 아니라도 말하련다.
딸이자 보호자이자 협력자이자 간병인이었던 캐서린.
그 부녀의 관계는 무엇으로도 증명될 수 없고
그 누구라도 감히 끼어들 여지가 없다.
연극은 마치 그것을 증명하는 어렵고 난해한 공식 같다.


연극 <프루프>는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천재수학자 존 내쉬와 그의 가상 딸을 소재로 쓰여진 작품이다.
2001년 드라마부문 퓰리처상과 토니어워즈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데이비드 어번의 극본은 아름답고 치밀하다.
아쉬움이 있다면 부녀를 제외한 다른 두 사람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는 점이다.
언니 클레어 역의 하다솜은 너무 신경질적이여서 오히려 정신과적인 진료를 받을 사람은 캐서린이 아니라 바로 그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2년 전 봤던 클레어는 이지적으로 도시적인 느낌이 강했었는데...
초반에 캐서린과 머리 영양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치 미장원 종업원이 손님에게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강매하는 느낌까지 들더라.
그리고 그 옆에서 손톱 손질하면서 함께 수다떨기에 딱 제격이었던 캐릭터 할까지!
목소리와 외모에서 지석진을 떠올리게 했던 김동현 할은,
아무리봐도 수학자같은 이미지는 아니여서 보는 내내 당혹스럽웠다.


클레어와 할 덕분에
순간순간 이 연극이 이렇게 수다스러운 작품이었나 생각했다.
(놀랍도록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윤지 캐서린은...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앗다.
목소리 톤이 급작스럽게 변한다거나 과장되게 표현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첫 연극 무대라는 걸 감안한다면 앞으로의 모습도 기대가 된다.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끌고 나가야 하는 캐서린.
그 역할을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끊임없이 감정의 변화를 조율하는 일도 쉽지 않았으리라.
스스로도 어느정도 대견해하고 있지 않을까?
젊은 배우들의 연극 무대 도전!
지금까지 "무대가 좋다" 시리즈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았던 작품이다.



"다 됐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야!'
연극 속에서 논문 초고를 들고 찾아온 할에게 로버트가 던진 말이다.
모든 증명의 완성은 항상 이런 반추가 아닐까?
살면서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모든 것들에게 마지막으로 던지는 화두!
그게 사랑이든, 학문이든, 집착이든, 두려움이든. 정신병이든,
다 됐다고 생각하는,
가장 위험한 그 때를 지나오는 증명만이
오직 위대하고 완벽한 증명이 될 수 있듯이...

한 편의 연극을 보고...
어쩌자고 또 다시 이렇게  멀리 와버렸는지...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7. 13. 06:39

"연극열전"처럼 계속 이어지는 시리즈 연극 기획물이 하나 더 생겼다.
"무대가 좋다"가 바로 그 주인공.
착한 글레머(?)라며 요즘 주가가 한창 상승 중인 연기자 신세경이 홍보대사다.
다양하고 좋은 연극이 활성화를 위해서
개인적으로는 이런 기획들이 더 많아진다면 좋겠다.
야심차게(?) 준비한 "무대가 좋다"가 선택한 첫 번째 작품 <풀 포 러브>
일단은 출연진이 무지 화려하다.
나무 엑터스(그래서 출연진이 거의 나무 엑터스 소속 탈렌트들이다)와
거대기업 CJ 엔터테이먼트, 악어컴퍼니가 손을 잡고 기획했단다.
남자 주인공 에디 역에 박건형, 한정수, 조동혁
여자 주인공 메이 역은 김정화와 김효진
이 심각한 이야기의 원인 제공자인 아버지 역엔 남명렬.
그리고 마지막으로 메이의 새 남자 친구 역의 박해수까지...
브라운관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해도 정말 과언이 아닌 프로필들이다.
거기다가 2년 6개월만에 뮤지컬 무대에서 연극으로 복귀한 조광화 연출작.
어쨌든 조금은 기대를 하게 만들긴 했다.



Fool for Love
이복남매인 주인공 에디와 메이.
뭐 이 정도까지만 이야기해도 대충 감이 잡히는 내용이다.
"너를 찾아 4,000 킬로미터..."
에디는 자신을 떠난 이복동생이자 연인인 메이를 찾기 위해 4,000 킬로미터를 달려 
드디어 이곳 모텔을 찾아왔다.
메이는 새로운 직장도  남자 친구도 생겼다며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떠날 것을 종용한다.
포스터엔 "격정적인 사랑의 광시곡!"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치명적인 끌림, 사랑과 증오, 우정과 질투 모든 것을 보여주는 연극이라는 해외언론평도 있다.
그런데 어쩌지?
보고 난 솔직한 심정은 Fool이 된 것 같다.
해외에서는 그랬는지 몰라도
내가 본 연극에서는 격정은 없고 단지 코믹만 있더라.
도대체 에디는 왜 4,000 킬로미터를 쉬지않고  달려왔을까?
고작 이렇게 농담따먹기나 하려고???
껄렁함을 넘어 멘탈이 수시로 이탈한 것 같은 에디와
시종일관 고음역대의 소리를 그야말로 바락바락 질러대던 메이.
(개인적으로 정말 듣기 싫은 소리영역이라 무지 괴로웠다)
이들의 목적이 고문인가 싶기도 했다.
어쩌면 그렇게 포스터의 느낌과 완전히 동떨어지는지...
마치 공갈빵을 손에 쥔 기분이다.
이 허무한 배신감을 뭐라고 표현할까?
그래도 뮤지컬이긴 하지만 무대경험이 많은 박건형과 김정화마저도 이런 시츄에이션이니
조동혁, 한정수, 김효진의 만남도 진지하게 걱정스럽다.



배두들의 톤을 들으면 내가 다 민망하고 절박해진다.
부족한 연습기간이 턱없는 흠으로 자주자주 드러난다.
급기야는 사소한 것들까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어쩌자고 여주인공의 치마는 침대보와 똑같은 천이고
(그 모텔에 투숙하려면 동일한 유니폼이라도 입어야 하는 건가!)
황당하고 학예회스럽던 음향과 시작과 끝에 나오는 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던 중얼중얼 거리는 노래.
(그런데 더 황당한 건 이 연극이 사실은 그 노래 분위기 같아야 했다는 사실이다)
오렌지빛 조명은 불안하고 뭔가 자극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서 처음엔 좋았는데
극이 진행될수록 이상하게 집창촌은 연상시켜 점점 불편해졌다.
차라리 대놓고 코믹 연극이라고 했으면 나는 유쾌하게 하하 웃으며 잘 봤다고 말할 수 있었으리라.
이례없이 길게 줄을 서가면서 표를 찾고
오랫만에 꽉찬 연극 객석을 보면서 흐뭇했었는데
찜찜한 기분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배우들의 명성에 실려 흥행에는 성공하겠지만
결코 좋은 평가를 받기에는 어려운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래도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이복남매의 사랑이라는 소재도 한 몫을 했겠지만...
보고 난 느낌은 대략 난감이다.
혹 모르지.
아직 시작이니고 9월 12일까지 한다니까 그 사이에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스스로 연극 첫 무대가 감격스러웠는지 박건형은 시종일관
극의 분위가와 어울리지 않게 소풍나온 아이처럼 어이없이 천진하다.
덩달이 시리즈도 아닌데 김정화까지도...
보물찾기까지 끝나고 소풍이 마무리가 되면 그제야 분위기 파악이 될라나?
제발 그랬으면...



배우들의 연기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혼란스럽고 괴리감마저 느낀다.
마치 두 개의 채녈을 수시로 돌리고 있는 느낌이랄까?
스토리 진행자(?)처럼 환상의 존재로 등장하는 아버지 역의 남명렬의 투혼이
오히려 눈물겹기까지하다.
(그런데 나는 극 중간에 그가 침대 밑에서 등장하는 그 말도 안되게 코믹한 모습이 너무 싫다)
그리고 그닥 존재감 있는 배역이 아닌 박해일의 모습까지도...
(이 사람 어디서 봤지? 생각했는데 목소리 듣고 기억했다. 뮤지컬 "영웅"에서 선생님으로 출연했던 배우)
나무 엑터스 김동식 대표는 계속 "무대가 좋다"에 소속 배우들을 출연시킬 계획이고
공연은 어찌됐든 대박을 칠 것이다.
그렇다면 기왕 대박 칠 거,
좀 치열하고 제대로 대박을 치면 좋겠다.
"연극열전" 역시나 연예인을 기용해 흥행에 어느 정도 성공을 하긴 했지만
"무대가 좋다" 기획보다는 그래도 더 괜찮았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됐다
다음 공연될 연극은 얼마전까지 공연됐던 <클로져>다.
안전하게 가겠다는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미 문제작이 될 전망이다.
국민 여동생 "문근영"과 요즘 TV와 영화까지 진출해 맹활약중인 배우 "엄기준"이 주인공이란다.
벌써 홍보 문구는 "문근영 스트립 댄서 되다!" 뭐 대략 이런 난감한 멘트로 시작된다.
티켓 오픈하면 이건 뭐 전쟁터가 따로 없겠구나 싶다.
혹시 "무대가 좋다"가 노린 게 바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라인업으로 나온 작품 중 소위 울겨먹는 작품이 상당하다.
(풀포러브. 클로져, 프루프, 트루웨스트, 댓페이스, 아트, 거미여인의 키스, 3일간의 비)
"무대가 좋다"라는 말이 과연 누구를 향해 좋은 건지
점점 궁금해진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5. 24. 05:55

기간 : 2010.05.19 ~ 2010.05.23
장소 :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극본 : 지경화
연출 : 채승훈
극단 : 창파
출연 : 남명렬, 김호정, 민경진, 이명호



제 31회 2010 서울연극제 참가작 8편 중에 
피날레을 장식하는(?) 작품이었던 연극 <옥수수밭에 누워있는 연인>
극본과 연출자는 낯설었지만
든든한 출연진만으로도 "must see" 목록에 포함시켰던 작품이다.
그런데 연극을 보고 난 후의 이 복잡하고 심란하고 불편한 감정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공연장을 나서면서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에
저절로 숨이 깊어진다.
참 막막하고 어려운 작품이구나...
그래도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공연장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던 찌질이가
결코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아주 큰 위로가 된다.




안개가 짙게 깔린 듯 운명적이며, 미스터리 하며, 원초적이며,
잔혹하며, 그로테스크하다!!

현실보다 잔혹한 환상, 환상보다 짜릿한 상상...

연극의 메인 헤드라잇은 이렇게 거하고 완강했다.
뒷북이긴 했지만 뒤늦게 시놉시스를 찾아봤다.
(시놉시스... 대략 참 난감하게 줄거리를 전해준다
 이것은 말을 한 것도, 말을 안 한 것도 아니여~~)

<시놉시스>
시와 도시의 경계에 선 어느 허름한 집. 여명이 어슴푸레한 새벽 그 집엔 이선(김호정)과 한보(남명렬)가 있다. 그들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친 듯 불안하고 초조하다. 지금 그들은 일종의 모의를 하고 있다. 이선의 아버지(한영:남명렬)로부터 거액의 돈을 타내기 위한 모략. 과연 그들은 아침을 맞아 그들의 계산대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그들은 걱정된다. 현실의 고통과 존재하지 않는 이상이 억울하다. 마치 거인의 걸음과도 같은 파열음이 들리고 한보는 이선을 집에 남겨둔 채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얼마 뒤 낯선 부자(父子)가 집에 들어선다. 이들 부자 역시 평범한 일상의 인물들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마음과 육체의 고통들이 당장의 그것들을 넘어 형이상학적인 쾌락이 된 듯하다. 그리고 아버지(민경진)는 죽는다. 이선과 아들(이명호)만 남았다. 그들은 다르지만 또 닮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때 한영이 찾아오고 한영은 총을 쏴 아들을 맞힌다. 마치 사냥꾼의 행동과도 같이. 그 사냥꾼은 바로 이선의 아버지다. 이선과 한영은 그러나 너무나 먼 거리에 있어 볼 수 없는 것처럼 서로에게 외롭다. 오늘로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 집에 남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비극적 통로로 자신을 몰아넣기 시작한다.



처음에 나는 맨발로 등장하는 이선(김호정)과 아들(이명호)은
이미 죽은 사람들, 즉 "귀신들"이라고 생각했다.
한보(남명렬)가 느끼는 추위와 두려움을 이선은 전혀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편안해 보이고 심지어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모든 상황를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자가 
자신의 뜻데로 모든 게 이루어지는 걸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묘한 관음의 시선같아 보였다.
(핀셋에 꽃혀있는 아직 살아있는 나비 표본을 바라보는 수집가의 섬뜩함이랄까?)
창백한 얼굴에 베낭을 메고 등장하는 아들은,
늙은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투정과 떼를 쓰는 비정상적으로 유아적인 인물이다.
불안한 시선과 페티즘을 떠올리게 하는 베낭에 가득한 여자 신발들.
그러니까  여자의 아버지 한영(남명렬)과 남자의 아버지(민경진)은
이 두 귀신들에 의해 상징적으로 죽은 존재들이며
이미 죽은  두 사람의 환상 속에만 살아있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은 그 환상 속 인물들과의 관계마저도
끝장을 내고 끊어버리게 되는 그런...



지금 가만히 되집어 생각해도 극의 내용은 집요하게 어렵고 표현은 찬란하게 수사적이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숙명과의 갈등을
나비와 사막이라는 단어 속에 마구마구 구겨넣고
참을성있게 앉아있는 관객에게 일방통행적인 이해와 공감을 끊임없이 
그것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 같다.
그 강요는 심지어 거의 무차별적으로 쏟아붓는 폭력처럼 어이없이 일방적이다.
이쯤되면,
작품의 이해 여부를 떠나서
그대로 수건을 던지고 링위에 뻗어버리는 편이 어쩌면 훨씬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다.
무차별 폭력의 뒤끝은 아직까지도 불편하고 내내 찜찜하다.

"도대체 나는 왜,
 일방적으로 그렇게 얻어터지고 있어야만 했는가?"
(혹시 나 지금 K-1 본거니???)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4. 21. 06:31
일  시 : 2010. 04. 17. ~ 2010. 04.25.
장  소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극  본 : 노시노부 코죠우
연  출 : 류주연
출  연 : 남명렬, 예수정, 김정영, 오일영, 장용철, 권지숙, 김원진, 신용진, 신용숙,




"잠들지 못하는 아빠와 일어나지 못하는 나 중에서 어떤 쪽이 더 불행해?"
어느날 딸이 이런 질문을 한다면,
아빠는 어떤 대답을 딸에게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그 딸이 이미 3년 전 무참히 살해당한 딸이라면?
연극 <기묘여행>의 시작은 이렇다.
자신의 베개가 있어야 잠을 잘 수 있는 아빠와
꼭 그 자명종 소리여야만 잠에서 깰 수 있는 딸의 실랑이는
차라리 마음이 들뜨게 만들고 심지어 다정한 모습에 귀엽성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여행의 비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여행가방을 정리하는  아빠의 가방 속에
청테이프, 로프, 염산, 드릴, 전기톱이 하나씩 등장하면
극은 분위기는 묘한 반전을 이룬다.
그래, 정말 이 여행은 <기묘여행>이 되겠구나...

 

연극 <기묘여행>의 원작은 2004년 일본의 토시노부 코죠우가 쓴 작품이다.
살해당한 딸의 부모(남명렬, 예수정)와 딸을 죽인 청년의 부모(오일영,김정영)가 만나서
사형이 확실시 되고 있는 살인자의 면회를 위해 함께 교도소를 찾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극에선 묘하게도 살인의 동기나 정황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의도적인듯...)
그러니까 딸의 아버지는.
지금 여행가방을 싸면서 혹시 있을 기회를 위해 철저한 복수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그의 무거운 가방은 그래서 이제 의미가 부여된다.
기회가 왔을 때 절대로 실수해서는 안 되니까,
그 짧은 순간에 가능한 모든 방법 중 한가지를 확실하게 선택해야 성공시켜야 하니까...
반대로 가해자의 부모는 지금 "희망"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중이다.
항소를 포기한 아들에게 "살아야만 속죄도 할 수 있다"고 설득하고
가능하다면 피해자 부모가 아들에게 이 말을 해주시길 간곡히 부탁한다.
(그것도 여러번...)

이들의 1박 2일의 여정은
지금 방금 이렇게 시작됐다.
죽이려는 자와 살리려는 자의 동행...
  

 

우리나라 무대 배경은 일본의 배경과는 많이 다르지만
무대 뒤를 따라 둥그렇게 나 있던 길과 분위기 따라 달라지던 스크린 배경은
때론 아름답기도, 때론 섬득하기도 하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살인과 사형제도에 대한 이야기.
그러면서도 왠지 이질감과 동감을 동시에 주는 코믹한 설정들과 대사들.
교도관이었을때 사형집행 경험이 있다고 말한 코디네이터 "테라하라"의 한 마디가 귀에 선하다.
"인권이 도대체 뭡니까?"
연극은 피를 토하듯 섬득하면서도 평화롭고 고요하다.
이들을 감싸는 묘한 기운에 나는 평온함마저도 느낀다.
그러나 진짜 그럴까?
"눈 뜰 수 없는 난 너무 불행해!"
극에 나오는 모든 이들의 심정이 살해된 가오루의 심정과 같지 않았을까?
지금도 자신의 마음은 살의로 가득하지만 죽일순 없다고 말하는 아빠와
무표정한 얼굴로 사건을 지켜보다
살해자와의 면회에서 가오루를 돌려달라며 의자를 집어던지는 엄마 역시도
결국 눈 뜰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건 아닐까?
이들을 눈 뜨게 하는 방법은 아무래도 가오루라는 자명종 하나 뿐인지도...



이상하지?
난 아버지의 마지막 대사를 들으면서
깊은 감동을 느끼면서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살의를 느꼈다.
그리고 그 느낌의 시작은 딸이 아빠에게 들려주는 칼이 몸 속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이야기할 때부터였다.
"뜨거운 물을 끼얹는 것 같이 뜨거워져서 소리가 났어!
 칼이 밀리는 소리, 피가 막 흘러나오는 소리.
 몸안으로부터 직접 들리는 우물거리는 이상한 소리
 어떤 악기로도 낼 수 없는 소리. 잊자마!, 아빠!"

혼(魂)인 딸의 대사가 끝나고
무대 스크린이 피가 튀듯 검묽게 변해가는 장면에선 "번쩍!"
휴즈가 끊겨버린다.
강렬하고 치명적인 뭔가가 가슴을 그대로 들이받는 느낌이다.
그래, 이제 이 말(馬) 위에서 도저히 유턴할 수는 없겠구나....

 <연출가 류주연>

살해된 딸 가오루의 아버지역으로 극의 전체적인 흐름을 끌고갔던
배우 남명렬 역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로
극의 마지막 부분을 꼽았다.
“살의로 가득하지만 도저히 죽일 수는 없다”
원혼(怨魂)인 딸 앞에선 복수하겠다 말하고 철저히 준비하지만 
결국 사형수 앞에선 무방비상태로 땀만 뻘뻘 흘리다 나오는 아버지.
인형을 찌르는 장면에서는 배우 입장에서 굉장히 연기하기 어려웠노라 그는 말한다.
더불어 관객들도 그 장면에서 배우가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까지도 전한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머릿속에 있는 풍경 중 어떤 게 진짜일까?”
당신이라면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연극 <기묘연극>
생명과 인간 존엄에 대한 이야기 이전에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정확한 폭로인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4. 5. 06:36
무대 위엔 꼭지점을 아래로 향하는 커다란 역삼각형이 층층히 쌓여진 종이더미 위에 위태롭게 서있다.
균형이 잡힌 정삼각형도 아닌 불안한 모습 그대로...
그 불안함 속에 해답을 위한 힌트라도 주는 듯.
높이 달린 창문을 통해 한 줄기 빛이 퍼져온다.
그러나 그 빛조차도 자세히 보면 불안한 삼각형의 형태다.
그리고 삼각 구도로 놓여 있는 의자 세 개.
그 의자마저도 정삼각형의 구조를 살짝 벗어나
시작은 분명 어느 한쪽으로 불안하게 기울어져 있다.
(물론 극이 진행하면서 정삼각형의 구조를 쟘깐씩 보여주긴 하지만)
내게 연극 <코펜하겐>의 첫인상은 그러니까
평형에 대한, 균형에 대한 일종의 불안한 도전이며 거부처럼 느껴진다.

역사 속의 세 사람,
닐스 보어(남명렬), 베르너 하이젠베르그(김태훈), 그리고 닐스 보어의 아내 마그리트(조경숙)
스스로 현실 속의 사람들이 아님을 고백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지금 하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중이다.
“왜, 1941년 하이젠베르그는 보어를 방문했는가?”


아버지와 아들 같은 사제지간이자 오랜 연구 동료인 보어와 하이젠베르그는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서로 적국으로 갈라서게 된다. 
하이젠베르그의 위험하면서도 비밀스러운 방문은
50년간 토론을 벌여왔으나 그닥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한 상태다.
연극은 세 번의 리플레이를 거듭한다.
그리고 매번 다시 묻는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가 찾아왔을까?” 를...
이들 세 사람은 이 질문을 통해
도대체 지금 어떤 해답을 얻고자 하는걸까?



연극 <코펜하겐>은 노골적으로 말해 아주 많이 어렵다.
그리고 심각하다.
게다가 지독히 아름답기까지 하다.
핵분열, 중성자, 원자로, 원자탄의 제조, 불확정성 원리와 상보성의 원리 등
수시로 등장하는 물리학의 개념들로 머릿속은 이미 무한대의 복잡성 안에 놓여있다.
어쩌면 이 연극을 이해하기 위해선 관객들에게 지독한 인내심이 필요할지도...
그러나 연극 <코펜하겐>에서 중요한 건,
그런 과학 원리나 학자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 이론을 끌어냈던 인간들의 본성과 진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Dark side of the moon"
그렇다면 그건 확실히 불가능한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긴 하다.
마침내는 인간이란 객체의 유사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될테니까...
시간의 개념조차도 무력하게 만드는 핵폭발을 능가하는 인물들의 충돌과 대면은
사뭇 진지하면서도 무척 재미있다.
수시로 돌출하는 날카로운 삼각형의 모서리들은
한쪽은 역사를 향해, 한쪽은 인물을 향해, 나머지 한쪽은 상황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하기도 하고 일시에 후퇴하기도 하면서 극의 생명감을 예리하게 살려낸다.
입 속에서서 쏟아져나오는 숱한 이론들과 과학에 몰두한 인간의 지독한 광기.
그리고 그 광기 속에 보여지는 학문에의 순수한 열정.
"과학"으로 덧씌워진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과 탐구.
그 치열함이 극 속에서 제 2, 제 3의 긴장감으로 고스란히 살아난다.
폭풍같은 치열함들...
(이런 치열함을 만나게 되면 나는 그만 정신을 잃게 된다...)



<마라, 사드> 이후에 무대 위에서 만난  배우 남명렬은
역시나 늘 아름답고 섬세하고 그리고 정확하다.
그는 매번 무대 위에서 삶의 터를 개척한다.
끝없는 유목민으로서의 연극배우 남명렬의 아우라가
그래서 나는 늘 깊고 다정하고 믿음직스럽다.
연극 무대는 시간과 열정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배우 남명렬.
 “살아가는 세월만큼 무대 위에서 녹아나기 마련이에요. 그 세월은 관객들에게 어필될 수 있어요.
  그러니 연극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시선을 조금 길게 봤으면 해요.”

이 말에 지극히 공감하는 관객이 여기도 이렇게 있다는 걸 그가 알까? (^^)
그는 연극 <코펜하겐>을 통해 관객과 ‘의미 있는 소통"을 희망한단다.
"우리는 현재 재미와 가벼움, 즐거움을 위해 달려가는 말 위에 있죠. 잠시 말고삐를 잡고 ‘속도를 조정해볼까’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이 작품과 함께 했으면 해요. 담론 자체는 거대하지만 그 속에 인간적인 부분들이 많이 있거든요. 유머도 있고.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말초적 세상에서 무언가를 돌아보고 싶다면 좋은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애쓰고 있고요."
속도를 조정하기...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일이 바로 그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치열한 연극 <코펜하겐>을 보고 나는 느긋한 "여유"를 느꼈다.
당연하지 않은가?
원래 인간의 삶이란 이렇게 늘 불확실 한거니까...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10. 2. 4. 06:29
 "저 소년은 오직 너제트라는 말만 포옹합니다.
  저 놈의 말 대가리를 제가 뒤집어쓴 것 같습니다. 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연극 <에쿠우스>의 시작은 이렇다.

얼마나 가슴 떨리게 하고 얼마나 치열하게 바라봤던 연극인가...
내가 기억하는 <에쿠우스>는
"중독"과 "탐욕"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대학로 세번째 연극열전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으로 2009년 다시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많이 두근거렸고 그리고 첫사랑을 재회하는 것처럼 마냥 떨렸다.
송승환과 조재현의 다이사트.
젊은 시절 알런으로 무대 위에 올랐던 그들의 감회에
주책없이 동참하기까지 했다.
김태우와 류덕환, 그들의 알런이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했다.



2005년 김영민 알런에 남명렬 다이사트를 신화처럼 그리고 아직도 현실처럼 생생하고 기억하고 있는 나...
5년만에 보게 된 <에쿠우스>는
그러나 내겐 황무지를 바라보는 것처럼 피폐한 모습이었다.
코믹버전의 에쿠우스를 보면서 10분의 뜬금없는 인터미션에도 불구하고
지루함과 오랜 싸움을 해야만 했다.
조재현 연출의 <에쿠우스>는
그전까지 봤던 집요하고 끈질기고 그리고 실험적인 공연을
과감하게(?) 시장판으로 내돌리기로 결정한 듯 하다.
연극의 대중화를 위해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열극열전 시리즈는
아마도 조재현이라는 배우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으리라.
그래, 그건 정말 인정한다.
그리고 그의 노력과 열정에는 누가 뭐래도 기립박수를 보낸다.
물론 연극열전의 작품들이 전부 괜찮았던 건 아니지만,
어찌됐든 뮤지컬의 대중화에 밀려 침체기에 놓여 있던 연극의 유료관객 수를 엄청나게 늘려놨다는 건
내게도 대단한 이벤트요 혁신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그래도...
에쿠우스를 시장판으로 내돌린 그의 연출에
나는 너무도 너무도 화가 치민다.



송승환, 류덕환
스크린을 압도한 두 배우의 연기는
알몸에 가까운 근육질의 8마리 말들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파괴된다.
(2005년에 비해 말 한 마리가 늘었다. 5년 후에는 9마리의 말이 등장하게 되는 건 아닐까???)
"정열을 파괴할 순 있어도 창조할 순 없다"
다이사트의 말이 무색할 만큼 알런의 열정은 그 전에 이미 사라졌고
(그래도 이 연극에서 제일 눈에 띄는 사람이 바로 류덕환이다.
그의 표정과 말투에는 알런이 어쨌든 담겨있다. 행동은 모호했지만... )
다이사트는 마치 TV 브라운관을 통해 드라마를 시청하듯 알런을 향해 내내 심드렁한 모습이다.
(여차하면 체널을 돌릴 기세다)
공연 시작 전에 송승환 다이사트가 먼저 나와 혼자 보란듯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
뭐랄까, 소문 무성한 무당집에서 바람잡이가 순서표를 나줘주며 손님들을 떠보는 액션 같이 불쾌했다.
그래도 아버지에 비하면 다이사트의 불쾌감은 그나마 봐줄만 하다.
철저한 금욕주의의 알런의 아버지는
"개그콘서트"에 출연해도 단박에 인기를 끌 수 있을 만큼 잔인하게 코믹하다.
코믹한 금욕주의자라니...
때때로 아버지로 인해 웃어대는 관객들.
나는 그런 웃음을 이끌어내는 연극이 너무 못마땅하고 너저분하고 난잡하게 느껴졌다.
알런의 아버지는 결코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그의 금욕이 비록 겉모습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그런 이유로 더 철저히 냉소적인 비웃음을 안겨줬어야만 했다.
그래야 극의 후반부 포르노 영화장에서 아들을 마주치는 장면에서 이중적인 인간의 근본과의 대면을 보며
관객들 또한 스스로의 모습을 보는 듯 진저리를 쳐야 했다.
그러나 2009년 에쿠우스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발정난 인간에 불과했다.
그는 아마 꿈에서도 금욕을 생각하지도 못할 인물이다.
그렇다면 알런의 어머니는?
교사출신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는
과연 자신의 아들에 대해 감정을 가지고 있기는 한건가?
2005년도에 나는 어머니에게서 어쩌지 못하는 "애증"을 느꼈다.
지금은 제멋데로 노는 아이에게 건성으로 대답하는 피곤에 찌든 부모를 보는 느낌이다.
알런의 부모들은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버린 걸까?



알런을 다이사트 박사에게 부탁하는 판사는.
아무래도 직업이 잘못 표기된 것 같다.
내가 느낀 그녀의 모습은 다이사트 박사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는 여비서에 불과했다.
늘씬한 다리를 보란 듯이 꼬고 앉아서
심각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도로 알런을 부탁하고 종종 찾아와 경과를 듣는 그녀는
당황스러웠고 깊이감이 없었다.
마치 가십기사를 대하는 여비서의 포즈 그대로였다.
그녀가 구하고 싶었던 건 불쌍한 알런의 영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판사가 유부남 정신과 의사를 상대로 신분상승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조용히 그녀의 손을 붙잡고 다른 정신과 의사를  만나게 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돈많은 재벌 노인네라도 소개시켜줘야만 할 것만 같다.



...... 혼란스러웠다. 연극 《에쿠우스(Equus)는 비극인데 관객은 숭고한 주인공이나 좌절이 아니라 다른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의 넋을 낚아챈 건 무대 위를 뛰어다니는 말(馬)들이었다. 절대 다수인 여성 관객은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때 온통 말 이야기뿐이었다.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근육질의 말 같았다. 그렇다면 연극이 변한 것인가, 관객이 달라진 것인가...... 이 연극은 미완성이다. 비극을 사랑한 관객은 실망했을 수도 있다. 말들을 강조한 이번 《에쿠우스》는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서성이는 것 같았다. 대중성을 얻었지만 작품의 정신까지 전달됐는지는 모르겠다. 즐기다가도 서글퍼졌다......

누군가 이런 기사를 썼다.
그리고 나는 전적으로 이 기사에 동의하며
이렇게 동의해야만 하는 게 너무 화가 난다.
"과연 나는 누구를 숭배해 본 적이 있는가?"
알런을 치료하며 스스로 던지는 다이사트의 질문은 공허해지고 말았다.
더불어 알런이 미치게 부럽다고 말하는 그의 고백 또한 정당성을 잃었다.
말의 성전에서 의식을 치르고 널브러진 알런을 부등켜 안으며
내가 널 치료해주겠다고 했을 땐
"너나 잘하세요!"라며 친절한 금자씨가 되어 말해주고 싶었다.
피곤에 찌든 다이사트가 자신의 힘으로 구할 수 있는 건 과연 뭘까?



2005년 내가 그토록 정열적으로 봤던 에쿠우스는
성적인 판타지를 주는 애로물도
턱없는 웃음을 주는 코믹물도 아니었다.
내 기억 속 알런과 너제트가 의식을 치루듯 달리는 장면은
성스러웠고 장엄했었다.
(그리고 나는 분명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었다)
그러나 떡칠(?)을 하고 나온 건장한 보디빌더들이 취하는 과한 동작들은
경박한 섹스코드를 눈 앞에 들이대는 것 같아 불쾌하고 난감하기까지 했다.
남창처럼 외부에 전시된 썬텐된 그들의 몸을 보며 나는 연극 <에쿠우스>의 비극성을
연극이 끝난 로비에서 느닷없는 느꼈다.
(그나마 그들 얼굴이 두꺼운 분장으로 덮여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맨 얼굴로 그렇게 서있었다면 얼마나 서로 난감했을까?)



2005년 포스터를 찾아 보면서 
같은 작품도 누군가에 의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걸 실감하며
나는 심각하게 <에쿠우스>에 대해 현재진행형으로 당황하고 있다.
어쩌면... 어쩌면...
김영민 알런과 남명렬 다이사트가 너무 강렬했기에 내게 <에쿠우스>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결코 그 고정관념을 나는 결코 깨고 싶지 않다.
2005년 <에쿠우스>는 내겐 분명 구원같은 작품이었는데
2009년 <에쿠우스>는 내겐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이 연극에 진심으로 칭클창클을 메고 싶다.
너접한 푸줏간을 다녀온 느낌이다.



    -----  only 퍼포먼스 <에쿠우스>
Posted by Book끄-Book끄
보고 끄적 끄적...2009. 10. 21. 06:20
오랫만에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 편 보다.
여성 연출가 박정희 연출, 극단 풍경의 <마라, 사드>
(원제 "사드씨의 지도하에 샤랑통 병원의 연극반이 공연한 장 폴 박해와 암살")
아르코 소극장의 그 따뜻함...
무대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누어져 있는 객석
작은 소극장의 비지정석 좌석도 
가끔은 솔솔한 재미로 다가온다.
이미 무대 위에는 배우들이 자리잡고 있다.
좌석이 전부 채워지는 내내 배우들은
마치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듯 움직임조차 고요하다.
왠지 내가 보여지고 있다는 느낌.
괜히 몸이 움츠려든다.



개인적으로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신뢰의 깊이만큼 정당하게 인정하고 믿는 연극배우 남명렬!
그가 서는 무대라면 적어도 어떤 형태로든 배신감은 없다.
<마라, 사드>
20세기에 발표된 가장 주목할 만한 희곡 중 한 편으로 꼽히는 작품.
극작가 "페터 바이스"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단다.
팽팽한 대각선의 구도 속에 느껴지는 긴장감.



무대의 배경은 샤랑통 정신 병원.
마르키 드 사드 후작은 실제로 이 샤랑통 정신 병원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사드(남명렬)가 직접 쓴 대본을 가지고
병원 환자들은 배우가 되어 연극을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면 마라와 사드. 두 사람의 사상에 대한 논쟁!
프랑스 대혁명의 이론가 장 폴 마라(홍원기)와의 
뒤집히고 뒤집히는 지적이고 황홀한 언어의 전쟁터.
그리고 결국의 행동의 결전장.
행동하지 않는 사상가는 과연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까?
혹은 인간의 육체로 해방을 꿈꾸는 자는 진정한 해방을 소유할 수 있을까?
논쟁의 결말은
오로지 극을 보고 있는 관객의 선택에 달려있다.



입장시 관객들에게 나눠준 카드 한장!
한쪽은 사드의 색 검정,
반대쪽은 마라의 색 빨강.
오늘의 관객은 마라의 결말을 선택했다.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
6.8 혁명과 베트남전쟁, 광주항쟁, 촛불집회...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와의 절묘한 오버랩.
의외의 마무리. 그러나 신선함이 느껴질만큼 강렬하다.
문득, 사드의 결말은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연극은 무척 참신하고 새롭다.
정통 연극에 뮤지컬적인 요소, 스크린을 이용한 영화적 요소.
그리고 실제 밴드들이 연주하는 음악적 요소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결코 산만하거나 엉성하다는 느낌은 없다.
깊이와 선택에 대한 통찰 또한 잊지 않게 한다.
순간순간 관객을 몰입하게 만드는 신비감.
썰물과 밀물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느낌.
(분명 어떤 흐름과 호흡이 있디. 주술적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같은 공간에서 느끼는 타인과의 일체감.
신비로운 접신(接神)의 황홀감.



배우 남명렬...
관객에게 정확한 감정을 전달하는 그,
보고 있는 사람을 마지막 하나까지도 완벽에 가깝게 집중시킨다.
그가 말을 하면 듣고 싶지 않아도 전부 들을 수 밖에 없다.
정확한 딕션과 호흡 그리고 여백.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선한 웃음을 웃는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나는
도무지 무대 위의 그의 모습이 신비롭기만 하다.
그와는 전혀 다른 인물인데 그는 그 인물을 너무나 그답게 보여준다.
좀 걱정스러웠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드"라는 성도착자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건 아닌지...
그런데 역시 기우에 불과했다.
상당히 지적이고 논리적이인 사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고 파괴적이기까지 한 모습.
인간에 대한 "충동질"
코르테를 안고 마라를 성토하는 번뜩이던 사드의 눈빛,
그 속엔 누구라도 거역못할 "광기"가 버티고 서 있었다.



"마라" 역의 홍원기.
배우로서의 이 분의 무대는 처음이라 낯설다.
신춘문예 당선,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이며
꽤 좋은 작품을 쓴 극작가이기도 한 홍원기!
음... 뭐랄까...
아마도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사드 남명렬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보여지게 연기한다는 생각을 그것도 너무 자주 했다.
의도적이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조잡한 내 이해력의 한계 때문인지도...



관객이 "마라"가 아닌
"사드"를 선택하게 되면,
극중 대본을 쓴 사드의 의도대로 마라의 죽음과 함께
환자들의 난동, 경호원들의 폭력적인 진압, 사드의 승리의 미소로 막이 내려진다고 한다.
"사드의 미소"
내가 보지 못한 그 결말,
사드의 미소 속에 담긴 언어가 궁금하다.




난 당신이 배반한 혁명을 믿을 뿐이요. 혁명은 계속돼야 해. 우리 위에 군림하던 돼지 같은 놈들을 제거하고 몰아냈지만, 그놈들의 자리를 차지한 혁명 동지들은 과거의 부귀영화에 대한 유혹을 느끼고 있어. 이제 모든 건 명백해졌어. 혁명에서 득을 본 사람은 부르주아들뿐이고 민중들은 여전히 고통만 당할 뿐이야 
                                         - 마라의 변

저렇게 떼를 지어 소란을 피우는 민중을 난 경멸한다. 난 모든 선한 의도를 경멸한다. 그런 건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사라질 뿐이다. 난 모든 희생을 경멸한다. 난 나 자신을 믿을 뿐이다. 
                                         - 사드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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