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6. 4. 21. 08:59

타인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족의 이야기다..

윤대녕이 11년 만에 쓴 장편 <피에로들의 집>엔 바람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바람"이란건 기실 "헛 것"에 불과하다.

그것 자체의 실체를 볼 방법은 도저히 없다.

바람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주변의 것들을 흔들뿐이다.

햇살 좋은 봄날 순한 낮잠같은 평온함이기도 하고

거대한 건물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쓰나미이기도 하다

마치 "가족" 처럼...

가족이라는 관계가 주는 무조건적인 애정이

나는 아주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궁금하다.

정말 믿어서 믿는건지, 이해가 충분히 돼서 이해하는건지,..

가족도 타인도 내겐 경계가 참 모호할 뿐이다. 

어쩌면.나란 사람도 집을 싸서 "아몬드나무 하우스"로 들어가는게 인간적으로 사는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들을 유사가족이라고 불렀던가!

하지만 나는 이 말에 절대 동의하고 않는다.

오히려 철저한 타인들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자기 앞가림 하나 못하는 인간들이 펼치는 오지랖 퍼레이드.

그런데... 그게 참 슬프고 아프다.

어딘가 하나씩 부러지고 고장난 소위 말하는 잉여인간들.

그런데 심지어 이들은 버티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것도 아니다.

유령같은 사람들.

심하게 표현하지면 살아있는 시체들이다.

생이 없는 삶.

죽은 채로 사는 삶.

그런데 어쩌자고 나는 또 그게 하나도 낮설지 않다.

 

다름이...

같음이 되버렸다.

피에로는 오늘도, 내일도춤을 추고 노래 부른다.

그게 누구의 생인지도 모른채 마냥 웃고 있다.

 

하여,

참견하지 말자.

간섭하지 말자,

이해하지 말자,

기억하지 말자.

그 어떤 것도.... 하지 말자!

누구라도.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6. 4. 12. 08:01

사실 이 책을 읽은지는 일주일 이상이 지났다.

그런데 뭔가 코멘트를 남긴다는게 엄두가 나지 않더라.

<세컨드핸드 타임>과는 또 다른 절망과 공포가 엄습했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전 사고.

그땐 뭣모르는 철부지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딴 나라 일이었고,

게다가 공산주의 소련은 우주 저 너머 안드로메다 보다 더 비현실적인 곳이었다.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그곳에... 나와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걸.

스베틀라나는 말한다.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

 

......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처럼 출근하고 퇴근한다. 월급도 평균적으로 받는다. 1년에 한 번씩 휴가를 떠난다. 아내와 아이들도 있다.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체르노빌 사람이 되어버렸다. 돌연변이가 된 것이다! 모두 궁금해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런 생물체가 된다.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고 싶지만 이제 불가능하다. 예전이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눈이 달라졌다..... 우리는 도시가 아니라 인생 전부를 잃어버렸다 ......

 

사고 관련 정보는 비밀에 부칠 것!

치료 결과 관련 정보는 비밀에 부칠 것!

해체작업에 참여한 개인의 피복 수위 관련 정보는 비밀에 부칠 것!

 

그 당시 소련의 정치가들은 이 모든 것들을 철저히 숨겼다.

국민을 상대로한 정부의 무차별 집단 타살 사건.

체르노빌의 방사선 수치는 측정기로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하지만 조사위원회의 대답은,

"다 정상입니다. 방사선 수치도 정상이예요." 였다.

아무런 지식, 경고 없이 원자로에 갔던 사람들.

더 많은 돈을 준다기에 원자로 지붕에서 폐기물을 맨 손으로 치웠던 사람들.

"체르노빌레츠"라는 신인류가 된 그들은 희망한다.

"내 소언이 뭔지 물어봐 줘."

"뭔데?"

"평범한 죽음......"

그들은 말한다.

체르노빌이 콜라마와 아우슈비츠, 홀로고스트를 넘어섰다고.

 

폭발한 체르노빌 원자로의 방사선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것과 같은 폭탄을 350개나 만들 수 있는 어머어마한 양이었다.

소련은 일본이 12년이라 걸려 세운 건물을 무려 2~3년 만에 만들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된 기술이 체르노빌의 비극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비극은 고작 시작에 불과하다.

세슘에 노출된 풀을 뜯은 소의 우유는 낙농장으로 보내졌고

오염된 지역의 송아지는 다른 곳, 깨끗한 지역에 값싸게 팔렸다.

이해할 수 있는가!

이 모든 비극이 체르노빌 하나로 끝나는게 아니라는걸.

반감기니 반가층 따위를 따지지 않더라도

그렇게 축적된 방사선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더 큰 비극을 초래한다.

 

...... 사람들은 체르노빌을 전체주의로 해석했다. 소련의 핵 원자로가 불완전해서 일어나 일이라고, 기술적으로 낙후했기 때문이라고, 러시아인의 안일함과 도둑질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했다. 핵의 신화 자체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충격은 빨리 사라졌다.방사선은 바로 죽이지 않는다. 5년이 지나 암에 걸려도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 환경단체가 수집한 통계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건 후 150만 명이 사망했다. 이에 대해서는 모두 침묵했다.

오늘날 거의 30개국에서 443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 중이다. 미국 104기, 프랑스 58기, 일본 55기, 러시아 31기, 그리고 한국에 21기가 있다. 종말을 앞당기는데 충분한 개수다. 그 중 20퍼센트가 지진 위험 지역에 있다 ......

 

무섭다.

이 모든 사실들이,

이 모든 진실들이,

이 모든 비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지 않을게 분명한 이 세계가.

 

어쩌면 우리는,

핵에 의해 종말을 맞을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6. 3. 31. 08:26

이 책을 읽는데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요근래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처절하게 읽어나갔다.

도저히 한 번 쓱 읽어지지 않았고

자주 책장을 덮은채 숨으 깊게 깊게 쉬어야만 했다.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읽으면서도 괴로웠는데

이 책과 비교하면 <죽음의 수용소>는 서정적이고 순수문학이라 하겠다.

구소련이 무너졌을때,

나는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당연히 다 찬성하고 기뻐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쪼깨젼서 분열된 나라을 바라보며 그들이 말한다.

"공산주의는 인류의 미래예요, 대체제는 없어요"

머릿속이 하얗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나쁜거라고만 배워왔는데

지금 그곳의 사람들은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었던 소련을 그리워한다.

지금의 자본주의 러시아는 미친거라고, 답이 없다고.

그들이 원했던건 자본주의가 아니라 인간적인 사회주의였다고...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건...

도대체 뭐였던걸까?

흑백논리, 빨갱이, 제국주의, 스탈린, 피의 혁명, 고르바쵸프, 옐친...

이 모든 것들 뒤의 진짜 소련의 맨얼굴을

나는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책을 번역하는 동안 난 참 많이 울었다. 주인공들의 끔찍하고 절절한 사연에 통곡을 했고, 그걸 한국어로 어떻게든 전달하고 싶었던 내 욕심과 현실적인 내 필력 간의 간극에 가슴 치며 울었다......

책을 번역하면 할수록 인간의적나라한 모습에 등골이 오싹했다. 어느 주인공의 말처럼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되는 시점이 어디부터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저 악인이 반드시 뿔 달린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내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끝까지 앍을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었다.

몇 장 읽지 않았는데도 책장을 덮어야 했고

그때마다 매번 숨을 한참 동안 숨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그러다 며칠간은 아예 책을 펼칠 엄두조차 못내기도 했다.

격양된 감정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다시 읽기 시작하면

더 큰 통증과 아픔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파고 들었다.

661페이지를 읽으면서 이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렇게 토막토막 책을 읽는 내내

죽음의 냄새와 살인의 냄새가 늘 함께 했다.

(정말이지 책을 읽다 미쳐버리는 건 아닌가 무서웠다)

 

이제 조금 알겠다.

나란 인간 역시도 이런 상황 속에 놓이면

"인간이 아닌게" 되거나,

혹은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하거나

둘 중 하나일거라고!

 

피하는게 맞는데 지금 내 손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또 다른 책이 쥐여져있다.

이번엔 떠 얼마나 오래 걸려 읽을지 알 수 없지만

또 다시 고통스러워보자 작정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제목만으로도 이미 숨통이 죄여온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6. 3. 25. 07:50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제 사라마구는 위대한 작가다.

이건 누가 뭐래도 변하지 않는 확고한 진실이다.

신약성서를 비튼 <예수복음>을 읽으면서도 혀를 내둘렸는데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 <카인>에서는 구약을, 아니 우리가 "여호와"라고 부르는 그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가차없이, 실랄하게, 그리고 유감없이 고발한다.

나는 유신론자다.

교회에는 안나간지 오래됐지만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적는 기독교인이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아니지만 독실한건 아니고 뭐 나이롱 신자... 그 쯤 ....)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이 여호와를 향해 갖는 의문은 상당히 정당해보인다.

카인의 번제가 아벨의 번제보다 정성스럽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여호와는 아벨의 번제를 선택했다.

카인은 말한다.

"주께서 아벨이 죽도록 내버려두신 것보다 큰 신성모독은 없다"고!

이 발언만으로도 심히 놀라운데

바로 여호와가 공동책임을 인정하는 뉘앙스까지 풍긴다.

"너는 나를 피해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나,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시간여행자가 되어 세상을 떠도는 카인.

또 다른 여러 현재들을 지나오는 동안 여호와에 대한 카인의 의심은 확고해진다.

아들 이삭을 번제로 죽이려는 아브라함을 보며

도대체 무슨 하나님이 아버지더라 자기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냐며 분개하는 카인은

불타는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면서는

죄없는 아이들까지 왜 죽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고백한다.

정직한 욥의 믿음을 실험하기 위해 사탄과 거래하는 여호와를 향해 의롭지 못하는 카인은 묻는다.

"여호와가 자신을 믿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데 왜 사람들이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나요?"

 

어쩌면 기독교인들은 이 책을 보고 사탄의 책이라며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카인의 질문과 분노는 정말 부당한가?

소위 독실한 신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카인과 같은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을까?

여호와의 전지전능함과 공평함에 반기를 들고 싶다는 생각,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을까?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분은 스스로를 무신론자로 말한다.

적어도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는 신은 죽었다고...

솔직히... 반론을 재기할 수가 없었다.

(어찌됐든 난 기독교인인데...)

 

카인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누군가 행복해지는 걸 눈뜨고 못보는게 분명하다고!

이 모든 죽음에 대해 도대체 누가 여호와를 벌할 것이며,

왜 아무도 하나님께 책임을 묻지 않느냐고.

인류의 역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오해의 역사이니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차례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됐다.

답답함에 연달아 2번을 읽었고

아마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읽게 될 것 같다.

결론은... 없다.

카인은 여전히 또 다른 현재 속에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나 역시 있다.

 

너는 진실로 카인, 아우를 죽인 그 비열하고 악한 자로구나.

당신만큼 비열하고 악하지는 않습니다.

 

오, 주여!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6. 3. 22. 07:51

만약 내게 다시 공부할 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미술사 관련 공부를 하고 싶다.

그것도 시대별로 아주 제대로, 그리고 아주 꼼꼼히!

회화작품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그 안에는 그림을 그렸을 당시의 역사와 문화, 풍습, 기후 그리고 기술의 진보까지도 다 읽을 수 있다.

때로는 한 장의 그림의 한 권의 역사책보다 더 많은 진실을 보여주고

때로는 한 장의 그림의 시대를 바꾸는 혁명의 발단이 되기도 한다.

칼과 총으로도 이뤄지지 않는 것들이

화가의 유연한 붓질 하나에 단호하고 막강하게 작용한다.

도화선.

그림은 역사 속에서 아주 자주, 그리고 확실하게 그 역할을 수행했다.

피카소의 그림이 그랬고, 고야의 그림이 그랬듯이.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은 그림을 보려고 손에 잡은 책이다.

일단 책 표지가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여서 반가웠고

(책 제목이 이 멋진 그림이 가린게 옥의 티이긴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는 각 시대 별로 중요 중요 포인트가 되는 경제 이슈를 읽는 재미가 솔솔했다.

깊이있는 본격적인 경제 지식은 아니지만

초보자가 흥미를 잃지 않도록 다방면에 다양한 에피소드와 역사적 사실들을

알기 쉽게 잘 설명해줬다.

책의 말미에 사라 베르나르와 알폰스 무하까지 언급해서 정말 깜짝 놀랐다.

책 표지 서두에 이런 문구가 있다.

'경제학은 어떻게 인간과 예술을 움직이는가?"

작가는 이 질물에 정말이지 아주 충실하고 재미있게 답변한다.

쉬운걸 어렵게 쓰는 작가들도 참 많고

미술이나 음악같은 분야는 특히 더 현학적이고 교과서적인 글들이 많은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가 않아서 매력적이다.

덕분에 미술사 관련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나를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책이 이어주는 꼬리물기는

언제나 늘 좋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6. 3. 18. 09:02

솔직히 제목만 봤을 때는 당연히 舌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雪戰이더라.

그야말로 하얀 눈밭같은 담론이다.

잘 알고 있지면 결코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스님 두 분의 이야기는 담백했고 그리고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이었다.

삶은...

이래야 하는건데.

단백하고 평범하고 그리고 고요하고.

 

책을 읽는 내내

종교가 아닌 진리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진리를 위해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 진리를 택하지는 않았다"

성철 스님의 이 말을 지금의 모든 종교인이 반드시 숙지해준다면 정말 좋겠는데...

세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집단이 종교집단인 것 같다.

혈연, 지연, 학연을 뛰어넘는 맹종의 파워.

되도 않는 세력다툼에 이리저리 쪼개지는 신도들을 보는게 싫어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지 않은지 오래됐다.

내 기억 속 교외와 관련된 마지막 장면은

교회 뒷편에 신도들이 이름이 씌여있는 헌금봉투꽃이였다.

그 앞에 서면 누가 헌금을 냈고 누가 안냈는지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모욕적이고 굴욕적이더라.

누군가에서 영문도 모르게 빰을 맞은 것처럼.

종교는 그렇게

진리와도 멀어졌고

사람들과도 멀어졌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모든 것이 다 본래 광명 속에 살고 있고, 우리 자체가 본래 광명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전체가 본래 부처이고 전체가 본래 극락세계인 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모든 존재를 부처로 섬겨야 합니다. 부처님이니까 부처님으로 섬기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 믿는 첫 조건으로 모든 생명,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모셔라, 모든 존재를 부모같이 섬겨라, 모든 사람, 모든 존재를 스승으로 섬겨라 하는 3대 조건이 있습니다.

 

흔히 '용서를 하자, 용서를 하자'고 하는데, 불교의 근본사상에 용서란 없습니다. 용서란 내가 잘하고 남이 잘못됐다는 것인데, 모든 것의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며,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남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설사 어떤 사람이 칼로 나를 찌른다 할지라도 찌르게 한 것의 근본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회'를 해야지 저 사람을 '용서'하다니요. 그래서 우리 불교사전에서 '용서'라는 말을 빼야 한다고 늘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잘못 상아왔구나...

내가 뭐라고 감히"용서"를 운운했을까?

내내 참회하며 살아도 모자를 판에 용서라니.

 

곁은 내주는 일은,

뼈와 살은 내주는 것보다 더 숭고하고 간곡하다.

무언가에 자신의 곁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내내 행복하겠다.

진심으로!.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6. 3. 17. 08:28

화, 목교일 중국어 수업때문에 자연스럽게 공연관람을 줄어드니

아무래도 책에 손이 더 많이 가는 것 같다.

덕분에 좋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은 솔직히 말하면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후속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연히 작가도 같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두 작가 모두 스웨덴 사람이긴 한데

메르타 할머니는 여자가 100세 노인은 남자가 썼다.

요나스 요나손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람에 일종의 상술이었겠지만

열린책에서 의도적으로 표지까지 비슷한 느낌으로 만들어서

당연히 연작이라고 생각했더랬다.

뭐 이 정도는 귀여운 사기(?)니 포용한 의향 당연히 있고!

 

 

일단 아주 잘 읽히는 책이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워서 금방 쓱~~~하고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사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이 이야가 조금도 공감되지 않는다.

일종의 판타지더라.

그래서 더 부럽더라.

스웨덴이라는 나라는 그런가!

80이 넘은 노인네들이 책 속 주인공들처럼 그렇게 활동적이고 혈기왕성하게 살고 있는건가?

그렇다면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유토피아라고 하겠다.

사회가 노년층을 취급하는 방식에 불만을 품은 노인들이 벌이는 기상천외하고 유쾌상쾌한 일련의 절도 사건들.

또 한 번 생각해도 여지없이 판타지다.

노년이 다 뭔가,

지금 우리나라는 부모에 의해 암매장 당하는 아이들도 있고,

늙은 부모에게 자신을 버려두고 사라진 사람도 숱하게 많은데...

그렇다면 각양 각색의 강도단이 판을 치기에 우리나라보다 더 좋은 환경은 결단코 없지 않을까?

 

그래서 이 재미있는 책이 재미있게 읽혀지지가 않았다.

읽는 내내 서늘했다.

이 거지같은 세상이 너무 흉물스럽고 괴기스러워서.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6. 3. 16. 08:30

또 다시 소명(召命))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 <높고 푸른 사다리>를 읽는 중에 의도한건 아닌데 <신과 함께 가라>라는 뮤지컬을 봤다.

궁금했었다.

도대체 어떤 믿음과 확신이 있으면

"주여, 제가 따르겠나이다"라며 순명(順命)을 맹세하게 되는지를...

내 주변의 사람을 버림으로써 모든 사람과 함께 가는 길을 택한 사람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공지영이라는 소설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읽었던 이 소설은 두 번을 읽었다.

작위적으로 짜맞춘 인물들간의 관계도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공지영 특유의 강의질하는 어투와 결말도 참 싫지만

이 책엔 의외로 가슴에 담기는 문장들이 많다.

 

그리고 베테틱토 수도회.

작년 스페인 여행때 베네틱토 수도회가 있는 몬세라트를 갈 것인가에 대해 꽤 오래 고민했었다.

카달루나 수호성인인 "검은마리아상"도 궁금했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몬세라트의 "에스콜라니아 소년합창단"의 성가를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베네틱토 수도회 그 자체에 있었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정신을 바탕으로

순명, 침묵, 겸손으로 기도와 독서, 노동을 행하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이 영적, 문화적, 종교적 삶을 살기를 희망하며

황무지를 개간하고 학교를 세우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같은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짐작조차도 할 수 없는 삶.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저를 받으소서.

그러면 제가 살겠나이다.

주님은 저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옵소서.

베네틱토회 봉헌의 노래 한 구절이

내내 가슴을 때린다.

 

그러면 제가 살겠나이다...

제가 살겠나이다...

살겠나이다...

제가...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6. 3. 11. 08:16

당장 읽을 책이 없기에 손에 잡은 에세이였다.

일단 제목은 별로였고, 표지는 맘에 들었고...

책을 쓴 작가가 "이석원"이라고 되어 있길래

설마 내가 아는 "언니네 이발관"의 "이석원"은 아니겠지 했는데 그 "이석원"이 맞더라

그래서 놀랐다.

그 다음엔 글을 너무 잘써서 놀랐고.

마지막으로 마치 내가 쓴 글 같아서 또 한 번 놀랐다.

 

..... 나도 그런 아이 중 하나였다. 무엇이 되고 싶다거나 뭘 해보고 싶은 게 도무지 없어서 늘 괴로웠고, 또 나만 그렇다고 생각해 자책했다. 난 스스로를 아메바처럼 여겼다. 내가 했던 일이라곤 버스를 타고 몇 시간 동안이나 할 일 없이 시내를 돌다가 종로에 내려 교보문고를 가서는 할 일도 살 책도 없으면서 미기적거리다 오는 것이 전부였다. 이게 뭔가 얘기가 되려면 그때 그곳에서 엄청난 책을 독파하여 마침내 꿈을 실현했네, 교보문고는 내 꿈의 자양분 어쩌구... 뭐 이래야 도겠지만 미안하게도 그런 것은 전혀 없다. 그곳은 내게 그저 비와 햇볕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 나무 그늘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소중했지만 .....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때부터 방학이 되면 제일 많이 갔던 곳이 교보문고였고

내가 버스타고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도 교보문고였다.

이석원과 내가 비슷한 나이니 어쩌면 우린 교보문고에서 서로 스쳤을 수도 있겠다.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책에 빠지게 됐다는거.

그러니까 책은 아주 어릴때부터 내겐 구원이자 피난처였다.

2남 3녀의 넷재딸은,

존재감이라는 눈꼽만큼도 없어서 뭘 해도 티가 나지 않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도 뭔가 티가 나는 행동을 할 생각도 없었다.

대가족 속에서 "혼자"라는 공간을 소망했고

그걸 "책"이 가능하게 해줬다.

책만한 쾌속정이 없다는 에밀리 디킨스의 말은 정말 진실이었다.

 

 

...... 책읽기. 그것은 내 인생의 혁명적인 변화였다. 책을 익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를..... 남의 삶을 엿보고 남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남의 상상을 맛보는 이 무서울 정도의 희열과 쾌감이 어째서 이제야 나를 찾아왔을까. 이제 막 발을 딛기 시작한 이 미지의 세계는 정말로 나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나는 두려움과 호기심 속에 점점 책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

 

뒤늦게 책에 빠진 이석원의 고백은 내 마음과 정학히 일치한다.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손목을 그어도 벌써 여러 번 그었을거고,

약을 털어넣어도 여러 번 털어넣었을거다.

책이 없었다면 나는 방향감각도 없이 낯선 곳을 서성이고 있었을거다.

나는 책의 보호를 받으며

매일 아침 깨어났고, 

매일을 살아냈고,

그렇게 매일 회복됐다.

이석원은 자신을 "보통의 존재"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석원이 모르는게 하나 있다.

"보통의 존재"가 정말 "보통의 존재"가 아니라는걸.

general 혹은 normal.

그 근처만 가도 좋겠다며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기에 언니네 이발관 이석원은 정직하게 말해 general 하지 않다.

비록 그가 엄청난 팬덤의 중심에 있는 인기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책이 출판된게 2009년이다.

그렇다면 그 안의 글들은 교정과 편집의 과정이 짧지 않았을테니

적어도 2009년보다 훨씬 전에 쓴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그걸 생각하니 뮤지션 이석원이 아닌 인간 이석원이 이해됐다.

그리고 혼자 그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다독였다.

 

이석원이 많이 부러웠다.

나는 아직까지도 보통의 존재가 되기 위해

이토록 절박하게 기를 쓰고 있는데...

 

보통의 존재.

어렵고

그리고 참 멀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6. 3. 10. 08:30

하가시노 게이고는 글쓰는 기계이거나

아니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걸 미친듯이 좋아하거나 둘 중 하나다.

게다가 요근래 나온 <나미아잡화점의 기적>과 <라플라스의 마녀>는

그의 소설 중에서 꽤 괜찮은 소설이다.

(개인적으론 <나미아 잡화점의 기적>이 더 좋았고!)

근데...

나도 이 사람 책 참 많이 읽긴 했다.

<라플라스의 마녀>를 읽으면서도 내내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라면 좋겠는데... 그랬더랬는데

결국 내가 생각하는 인물이 범인이고 모든게 거짓이고 그러더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건

이야기를 끌고가는 힘이 시종일관 흥미롭고 쫀쫀해서였다.

추리물에 이골이 난 하기시노 게이고가 선보이는

재주넘은 여우 버전이라고 하겠다.

이걸 과학이라고 해야 하나, 기적이라고 해야 하나, 공포라고 해야 하나????

계획된건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천재와

자발적으로 제조(製造)되는 같은 버전의 천재.

그렇다고 이들이 싸이보그인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보다 더 심각한 존재들.

그런데 이게 공상과학처럼 느껴지지 않은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현실감이다.

그리고 그게 우리나라에서 하가시노 게이고가 인기있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정말 세상 어딘가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수술로 만들어지는 후천적인 천재들이

실험실에서 극비리에 연구되고 실험되고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그건 쫌...

인정하기 싫은 공포긴 하다.

 

인간이 완벽할 이유는 없으니까.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도 없고,

또 신이 되어서도 안되니까!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