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2. 6. 27. 08:22

2006년도에 구입했던 컴퓨터가 지난 날에 장렬히 전사하셨다.

윈도우를 몇 번 밀고 다시 설치했었는데 이제 그만저도 안 된다.

내장 부품에 문제가 있는데 단종된 제품이라 그냥 컴퓨터를 새로 구입하는 게 나을거라고 AS 기사가 가차없이 말했다.

(참 친절도 하시다....)

욱하는 심정으로 인터넷도 끊었다.

그랬더니 새세상(?)이 열렸다.

아침 시간이 넉넉해지면서 컴퓨터를 했던 시간에 책을 더 많이 읽게 됐다.

생각해보니 컴퓨터는 일터에서 하는 걸로도 충분했는데

뭘 알고 싶은 세상사가 많다고 그렇게 집에서까지 끼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당분간은 인터넷과 컴이 없는 가정생활(?)이 지속될 것 같다.

상당히 괜찮은 생활이다.

이것도 일종의 생활의 발견이라고 버젓히 우기고 싶을 만큼!

 

한 청년이 단지 다른 사람에게 잰 척 할 목적(?)으로

자신의 세계여행에 네팔로의 자원봉사 3개월을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게 한 쳥년의 인생을 180도로 바꿔놨다.

10년 가까이 이어진 내전으로 피폐해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네팔.

최악의 희생자들은 언제나 힘없고 약한 아이들이다.

공공연히 자행되는 아동 인신 매매.

가난하고 외진 산속 마을 아이들이 전쟁의 혼란 속에 부모의 품을 떠난다.

안전한 삶, 교육의 기회를 약속하는 낯선 남자의 손에 이끌려 부모를 떠난 아이들은

아가 되어 거리에서 구걸하고 구타당하고 심지어는 노예가 된다.

청년은 1년 뒤 다시 네팔로 돌아갔다.

그리고 잃어버린 7명의 아이들을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비영리단체 NGN(Next Generation Nepal)를 만들고

히말라야의 가장 높은 봉우리 이름을 따서 다울라기리 하우스라는 보육원을 설립한다.

이 남자의 인생은 이제 더이상 예전처럼 편하고 안락한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

누군가의 인생이 한순간에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구니.

아이가 없는 곳에는 천국도 없단다.

이 사람이 만든 천국에 있는 천사들이 참 다행스럽다.

심지어 이 남자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부모를 찾기 위해서도 고분분투한다.

외면할 수 있었을텐데.

한 번의 자원봉사로 평생을 뿌듯해할 수도 있었을텐데...

코너 그래넌이란 사람 확실히 거인이다.

가진 게 턱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늘 힘든 나는 감히 외경심조차 품기도 민망하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 따뜻해진다.

그건 진실이다.

그리고 지상 위에 천국은 확실히 있다.

 

* www.nextgenerationnepal.org 

 

오래 기다렸었다.

은희경의 침묵이 좀 길어지는 것 같아 혼자 안달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녀가 돌아왔다.

<태연한 인생>으로 정말 태연하게.

류와 요셉.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매혹과 고독, 환멸에 수시로 넌더리가 났다.

고독을 견디도록 도와주는 것이 삶에 남아 있는 매혹이라는데

그 모든 매혹은 또 고독의 그림자를 감추고 있단다.

인간은 환멸때문에 사는건가?

결국 사람의 인생은 하찮은 우녀의 복수가 수없이 잠복해있는 불길하고의외적인 게임이 될 수밖에 없단다.

평소친하게 지난 지인의 가족들과 함께 벼르고 벼른 가족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고 막 출발하려는데 문득 두고온 게 생각나 열쇠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

여자는 잠시 망설였을까?

필요한 물건을 서둘러 챙겨그냥 나올 것인자, 아니면 전화를 받을 것인지...

전화를 건 사람은 남편의 내연녀다.

여자는 통화를 끝내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에 오른다.

딱 이 여자가 된 느낌이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은희경은 해피엔딩으로 끝내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엔딩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에 온전히 공감했다.

지겨운 관계이기 때문에 지속되는 관계도 분명히 있다.

새로움은 짧고 그것이 풍부한 변주로 이어질 만한 내적 체계까지는 갖춰져 있지 않다.

새로움이 지속되기에는 그 서사가 빈약하다.

지겨움 속엔 그래서 뜻밖에 중독성이 있다.

 

태연한 인생은 시종일관 독백의 형태로 나를 흔들었다.

참 몰염치하고 냉정한 책이다.

거울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건

언제나 참담하고 버겁다.

거울아!

제발 두껍고 모진 세월의 더계로 흐린  잠상만 힘겹게 비춰다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1. 6. 14. 05:47
누군가는 그랬다.
공선옥의 소설속 인물들이 너무 구질구질하고 우울하다고.
그래서 그 기분이 꼭 자신한테까지 퍼지는 것 같아서 읽다가 그만두게 된다고.
그렇다. 공선옥의 인물들은 정확히 이런 모습이다.
그런데 나는 그 인물들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내 살 같고, 내 뼈 같아 마디마디가 저리고 손톱끝까지 아파온다.
한참을 붙들고 울고 싶은 심정...
그러나 그 인물들은 지친 울음 끝에서 항상 새롭게 시작할 힘을 보여준다.
절망 속에서 희망이 피어날 수 있다는 걸 난 그녀가 만들어낸 인물을 통해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녀는 나에겐 하나의 현실이며 동시에 극적인 다큐다.
1년 사이에 자폐아 아들과 남편을 모두 잃은 여자!
이야기 속에서도 단 한번도 본명을 내비치지 않는 여자!
막걸리와 빵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여자!
아이와 남편이 좋아했던 작은 정원엔 이제 이웃 건물에서 버린 쓰레기로 가득차고
그 집에서 살아있지만 철저히 죽어있는 여자!
이 여자가 나는 안스러워 자꾸 내 가슴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렸다.
어쩌면 좋을까... 이 여자...
그리고 이 여자때문에 아픈 나는 또 어쩌면 좋을까...
...... 사는 동안은 눈물 흐르는 소리를 견디며 살아야 할 것이었다.
눈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 일종의 형벌일 터였다.
그 형벌을 달게 받기로 했다. 달게 받기로 한 때부터 고요해졌다 ......

그녀의 고요는 죽음보다 더 적막하다.
죽음보다 깊고 죽음보다 더 차다.



영란과 이정섭!
체기같은 마른 울음을 몸 안에 담고
길고 지루한 장마같은 생을 살아가는 사람.
매혹은 힘겨움을 이기지 못한다는데
나는 이들의 힘겨운 삶에 어이없이 매혹당하고 말았다.
때로 사랑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환별 또한 그럴 수 있다는 사실 앞에
나 역시도 전율했다.
누구를 향한 환멸이건, 환멸이 사람을 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공선옥이 말한다.
...... 이 이야기는, 한 슬픔의 사람이 어떻게 슬픔을 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가에 관한 것이다.
누구나의 생애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숙명이다. 아프더라도 또한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하니, 산다는 것은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나는 '지금 슬픈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내치지 않기를 바란다. 외면하지 말기를 바란다. 슬픔음 방치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슬픔을 돌볼 시간이다. 내 글의 독자들이 슬픔을 돌보는 동안 더 깊고 더 따스하고 더 고운 마음의 눈을 얻게 된다면, 그리하여 더욱 아름답고 더욱 굳건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슬픔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쓴 사람으로서, 많이 기쁠 것이다 ......
어쩌면 이 이야기가 상처받은 두 남녀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식상한 구조였다면
나는 가차없이 외면했을 것이다.
변하는 건 없다.
본명을 드러내지 않는 여자는 "영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허름한 영란집에서 간재미회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랑은 다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 떠나버린 사랑이 남긴 상처는 남은 사람의 일생을 관통한다.
그러니, 사랑한다면 떠나지 않아야 한다. 떠날 거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한다 ......

생명은 태동할 때도 눈물겹고
살아갈 때도 눈물겹고
소멸할 때도 눈물겹다단.
그래서 세상의 모든 생명은 눈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단다.
<영란>을 읽으면서 나는 끝없이 "영란"을 불러 세웠고
그렇게 불러 세운 "영란"은 나를 위로한다.
내가 불러서 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세상에서 내가 부르면 달려올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대답을 알고 싶다고 직접 불러봐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못하는 건,
아무도 달려오지 않을까봐서다.
차디찬 한기만이 우뚝 서있을까봐 두려워서다.
내 속으로 키운 한기를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아서다.
공선옥은 어떻게 견뎠을까?
어떻게 견디면서 울음같은 글들을 내내 썼을까?
그녀는 언제나 내게 서러운 눈물을 심는다.

깊게 깊게 울고 싶다.
그러나 또 깊게 깊게 참는다.
울어도 편치않을 울음이라면
울지 않는 게 나을테니까...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