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책거리2008. 12. 28. 19:38

<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인간의 공포심과 잔혹함, 그 인간성의 바닥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책입니다.

단언컨대, 제가 아는 최고의 공포소설입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보다도 더 공포스럽게 다가오죠. 헉슬리가 말한 세계는 그래도 SF적인 요소가 있어 “에이 설마...”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데 이 소설은 그냥 그 자체가 정말 너무나 현실로 다가와 사람을 섬뜩하게 만듭니다.

3년 전이네요.

“주제 사라마구”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게...

처음 친구에게서 이 사람의 이름을 들었을 때, 일본 사람인가? 했더랬습니다.

1922년 포르투갈 출생으로 아직까지 건장하게 활동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대가 중의 한 분입니다. 1998년 95번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구요.

2008년에도 자국에서 <작은 기억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네요.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끊임없이 작품을 써내려가고 있는 그가 사실 더 공포스럽긴 합니다.

지난달 드디어 이 원작을 토대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죠.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러스는 원작을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고 그대로 살리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고 하네요.

그는 주제 사라마구 단 한 사람을 위해 포르투갈로 직접 날아가 특별 시사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주제 사라마구가 오랫동안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동영상을 통해 우연히 보게 됐는데 제 가슴까지 찡해졌었습니다.

대가에 대한 깊은 헌사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작품이 영화화 된다고 했을 때, 정말 가능해?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만들겠다는 거지?

설마 원작에 상처를 주게 되는 건 아닐까?

특별한 느낌을 갖게 한 책에 대한 걱정과 우려. 그리고 그냥 책으로 남겨두면 안 되나...하는 개인적인 바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정말 괜찮은 영화가 만들어졌더라구요...

(저, 개봉하는 날 냉큼 달려가 봤습니다. ^^)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은 읽은 이를 긴장하게 만들기로 유명합니다.

소설 속에 쓰이는 문장 부호도 오로지 마침표와 쉼표뿐입니다. 대화나 독백 같은 대사조차 따로 구분해서 쓰지 않고 그대로 계속 문장 안에 포함시켜 버리죠. 그래서 처음엔 당혹스런 느낌마저 갖게 됩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만날 때 느끼는 불편감이라고 할까요?

지금은...

그러한 문단 자체가 작가의 의도를 해석하는 하나의 포인터였다는 걸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의 글을 읽을 때 긴장하지 않고 읽는다면 아마도 대번에 책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 쉬울 겁니다.

읽는 사람의 몸도 마음도 송두리째 몰입도록 이끌기에 그의 이름 앞에 대가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건 아닐지......(솔직히 작가에게 끌려 다니는 것도 등장인물들에게 끌려 다니는 것  만큼이나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하나 둘씩 아무 이유도 없이 눈이 멀게 됩니다.

“백색 공포”가 도시 전체를 뒤덮게 되죠.

정부는 급기야 그 사람들을 따로 격리하고 관리하기로 결정합니다.

여기에 눈이 멀지 않은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 여자는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어차피 나도 곧 남편처럼 감염될 테니까......

이곳에서 여자는 눈이 먼 사람들의 모든 눈이 되어 생활합니다.

도무지 약자와 강자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인간의 탐욕은 장하게도 강자와 약자의 권력을 명확히(?) 분리해냅니다. 게다가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체 새로운 권력이 휘두르는 잣대에 그대로 따르게까지 되죠.

“먹을 것을 원한다면 당신들의 여자를 바쳐라”... 도대체 이런 상황에 성이라는 요소가 끼어들 자리가 과연 있는 걸까요? 그런데 정답은 어이없게도 “그렇다!”는 사실입니다.

눈 먼 남편들은, 애인들은 그들의 눈 먼 여자들을 줄 세워 보냅니다.

그리고 눈 먼 그녀들이 몸으로 얻어 온 음식물을 그들의 목 안으로 삼키죠.

아마도 그 순간, 그 곳의 사람들은 그들의 눈에 이어 그들의 입(말)조차도 잃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됐던 균형감이 왠지 깨지는 소리가 들리네요.

상황이든, 사람이든, 뭐든 달라지겠구나 하는 예감...

예감은 적중합니다.

수용소에 불이 나고 눈 먼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집니다.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도 돌아가라고 명령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그들 세상 모두가 “백색 공포”에 감염된 상태였으니까요.

거리는 온통 끔찍한 형상으로 변해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기에 대소변을 아무 곳에서나 보고. 질서는 무너지고 도시는 쓰레기와 똥, 오줌으로 뒤덮입니다.

차라리 인류 심판의 날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네요.

행렬이라는 거, 줄이라는 거, 이 책에서는 마치 생명줄의 연장선처럼 보입니다.

단 한 명의 눈에 의지해 서로의 어깨를 잡고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세상을 사는 방법은 단 사람에 의지해서이고, 그들의 생명도 또한 단 한 사람에 의해서만 계속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들에겐 절대자, 즉 구세주가 되는 셈이죠.

눈 먼 무리들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그들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해오고 더러운 몸을 씻기고, 옷을 세탁합니다.

힘들었겠죠, 지치고 그리고 그만두고 싶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그녀는...


이유 없이 눈이 멀었던 것처럼,

다시 이유 없이 한 사람씩 시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읽는 사람도 공황 상태로 몰고 갈 만큼 갑작스런 상황이라 조금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눈이 보이게 된 사람들 중간에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던 그녀는 눈이 일시적으로 하얗게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갑작스런 공포로 이제 내 차례인가 중얼거리는 그녀의 눈 속에 도시는 다행히 그 모습 그대로 보여집니다.

이 모든 끔찍한 것들을 오로지 혼자서만 보고 경험한 그녀가 말합니다.

......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 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들의 눈을 멀게 만든 그들 내부에 있는 이름 없는 뭔가에 대해서였을 겁니다.

그 뭔가는 바로 우리 자신이죠.

다행히 그들은, 아니 우리는 회복됐습니다.

그러나 누군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8. 12. 26. 06:03

<도플갱어> - 주제 사라마구


 
 


 

 

 

 

 

 

 

 

 

주제 사라마구는 1922년 포르투칼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1998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현존하는 몇 안 되는 대가중에 한 분이시죠.

저는 <눈 먼 자들의 도시>란 책을 통해 이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눈 뜬 자들이 도시>까지 열심히 찾아 읽는 얼치기 팬이 된 상태입니다.

얼마전엔 <동굴>까지 찾아 읽었고 지금은 새로운 책을 읽을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

도플갱어는 주제 사라마구가 84세의 나이로 쓴 소설로 작가를 몰랐다면 아마 젊은 사람이 썼다고 생각할 만큼 신선하고 특별합니다..

(우리 병원 도서관에 구비되어 있답니다 ^^)

* 참고로 주제 사라마구의 대표작 3권(눈 먼 자들의 도시, 도플갱어, 동굴)을 인간에 대한 3부작이라고 합니다


도플갱어...

독일어로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자'라는 뜻으로 더블(분신 복제)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도플갱어는 '또 하나의 자신'을 만나는 현상인데 현대 정신의학 용어로는 오토스카파(자기상 환시)라고 하네요.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존재가(본인도 모르게 헤어진 쌍둥이 이야기 절대 아닙니다) 어딘가에 살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인구 500만의 대도시에 거주하는 중학교 역사교사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는 어느 날, 동료교사의 추천으로 비디오 한 편을 빌려보다 자신의 5년 전 모습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영화에 나오는 걸 발견하게 되고, 하나하나 그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드디어 서로를 대면하게 되죠,

팔뚝의 점, 후천적으로 생긴 흉터까지도 꼭 닮은 외모, 거기에다 목소리와 지문까지 똑같은 두 사람의 존재는 서로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동이자 공포일 수 있습니다.

이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두 사람의 싸움은 각자의 배우자와 연인들, 그리고 가족들까지도 얽히게 됩니다.

이 둘은 결국 서로의 자리를 바꾸게 되고(그 상황이라는 게... 서로에 대한 책망, 분노, 그리고 어쩌면 조금은 끔찍한 쾌락까지도 포함된) 그 상황에서 한 명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

세상엔 이 둘이 서로 바뀐 사실을 아무도 모릅니다.(나중에 어머니가 알게 되긴 하지만 그 사실 자체가 비극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까요?

산 자가 죽은 자로 행세하며 여생을 마쳐야 하는 상황...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냥 스쳐지나가듯 인간의 잔인함과 섬뜩함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섬뜩함 뒤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생각과 과거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도 결코 강요된 교훈이 아닌 파고 드는 느낌으로...

혹 이 책을 읽고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 보고 싶은 분들은...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적극 권해드립니다.

어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단 한 명만 빼고 이유도 없이 눈이 멀어 갑니다. 다수의 눈 먼 사람들의 공포와 단 한명의 눈 뜬 사람의 공포로 전개되는 이야기...

그 속에도 인간의 섬뜩함이 숨어 있습니다.

 

도플갱어 현상은 현재는 신비주의의 현상으로까지 확대 이해되고 있습니다.

미스터리의 하나로 간주되기도 하구요.

자신의 분신, 또 다른 도플갱어를 만나게 되는 사람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도 하고, 그 현상에 대한 많은 사례가 알려지고 있기도 합니다.

혹 도플갱어를 만나게 되면 말을 걸면 안 된다고 하네요.

어쩌면  살아남을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요...(약간 공포스럽죠?)

인간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데자뷰 현상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면....

memento mori.....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말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Remember! You must die!!!"


주제 사라마구...

제가 이곳에 꼭 소개하고 싶었던 작가 중 한 분입니다.....

이 분의 책을 읽을 때의 주의 사항 하나!

문단이라는 게 없습니다.

첫장부터 마지막 까지 빽빽하고 알찬 책을(?) 만나실 수 있답니다.

그래서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같은 줄을 몇 번이고 계속 반복해서 읽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는....
어쩐지 제자리 걸음을 걷는 것도 같고, 같은 곳을 뱅뱅 돌고 있는 그런 느낌...

인간에 대한 혼란,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의도하는 의식적인 문단 형태는 아니였을까  추측성 판단을 하게 만드는 묘한 책입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8. 12. 21. 10:55

  <엄마를 부탁해> -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그녀가 낸 작품들은 모조리 읽었습니다.

하다못해 산문집까지도...

제게 있어 신경숙은 질투의 대상이이기도 했고,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고, 그리고 실망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녀만의 독특한 감성과 글쓰기에 얼추 젖어버렸다고 할까요?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의 제 느낌들이 작가로서의 그녀에 대한 종착역은 결단코 아닐 거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

평범한 일상을 너무 아프게 써 어느 날은 혼자 화가 났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면은... 나를 들여다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뜨끔한 자괴함과 부끄러운 속내를 들킴에 대한 막무가내의 억지였던 건 같네요.

“풍금이 있던 자리”

가령 그녀의 글쓰기는 그렇습니다.

풍금이 있는 자리가 아니라 풍금이 있던 자리인 거죠.

화자가 바로 <나>여야 하는 이야기를 그녀는 <당신>으로 바꿔놓습니다.

그녀의 모태 신앙 같은 도시 정읍, 그리고 차마 분명한 이름조차 갖지 못한 체 등장하는 이니셜의 인물들...

게다가 대화조차도 문장부호 없이 그대로 써버리는 당혹감...

<리진>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잠깐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시도했던 그녀가 다시 초기작으로 돌아왔네요.

지극히 “신경숙다운” 소설과 함께요...


철들기 시작한 딸들 중 “엄마”라는 이름에 가슴 아프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이 책은 모태로부터 시작된 자식들의 원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총 5장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엄마를 잃어버린지 일주일째다”.....

지독한 두통과 점점 잃어가는 기억들, 수시로 찾아오는 통증을 숨기고 노부부는 자식이 있는 서울로 올라옵니다.

예전의 우리네 아버지들의 발걸음.

아내와 같은 속도로 함께 나란히 걸어가는 게 마치 무슨 대단한 흉이라는 되는 냥 성큼성큼 앞서 갑니다.

자식들의 마중을 마다하고 지하철을 탄 남편의 등골이 순간 오싹합니다.

글조차 읽지 못하는 그 아내가 열차를 타지 못했던 거죠.

성급히 남편은 남영역에서 되집어 전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게 4명의 다 큰 자식들은 속수무책으로 어미를 잃습니다.

 

각각의 장은 큰딸, 맏아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다시 큰딸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큰딸의 이야기는 “너(2인칭)”의 시점으로, 맏아들의 이야기는 “그(3인칭)”의 시점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는 “당신(2인칭)”의 시점으로, 그리고 어머니의 이야기는 “나(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엄마를 찾는 전단지를 만들기 위해 모인 가족들은 서로에게 긁힌 상처를 드러내며 새로운 상처를 만듭니다.

그들에게 던져진 화두 두 가지!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나?”

“엄마가 홀로 남겨지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했는가?”

이제 그들은 전단지를 보고 연락한 내용을 따라 엄마를 찾아 헤맵니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예전에 그들의 첫 직장이 있었던 곳이고, 본인 명의의 첫 집을 장만했던 곳 등, 모두 그네들의 흔적이 스친 곳이기도 합니다.

엄마는 정말 그 곳을 다녀갔던 걸까요?

파란 슬리퍼에 뼈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상한 발을 끌고...


우리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엄마에겐 사연이 없다고... 엄만 그냥 처음부터 엄마일 뿐이라고...

어쩌면 이해할 마음조차도 미처 갖지 못할 만큼 자식으로서의 이기심이 너무 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엄마에게도 돌아가 편히 쉬고 싶은 집이 있었을 테고, 그리고 그 엄마에게도 무릎을 베고 누우면 다독여 줄 엄마가 일평생 필요했을 거라는 걸, 우리는 정말 알고 있었을까요???

그런 엄마가 어느 날,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 갈란다... 잘 있으시오”


엄마를 잃어버린 지, 9개월째...

작가인 큰딸은 이탈리아 성 베드로 성당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녀는 그 곳에서 여동생의 편지를 떠올리며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앞에 섭니다.

“.......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없는 일까지도 다 해내며 살았던 것 같아. 그러느라 엄마는 텅텅 비어갔던 거야. 나는 엄마처럼 못 사는데 엄마라고 그렇게 살고 싶었을까?......”
감히 누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요?

“엄마니까....엄마란 다 그런 존재니까....”

저는 죽어도 이렇게 말 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소리조차 죽이며 흐느꼈던 내 어미의 아픈 통곡과 내 손을 붙잡고 놓지 않던 내 어미의 거친 손이 지금 저를 여기에 있게 했으니까요...

결국,

이 책은 또 제 이야기이기도 한 셈이네요.


피에타 상...

죽은 예수를 품에 안고 고통과 절망의 순간을 이겨내고 있는 성모 마리아.

어미의 무릎, 제 2의 모태 속에서 아들은 드디어 평온을 맞이합니다.

어미의 손길이 스치기만 하면 이제 모든 고통과 절망은 사라져 흔적도 없어질 테죠.

비로소 모든 잃은 생명 또한 비옥해져 싹이 틀 것이며 자라나 열매를 맺게 될 겁니다.

내 어머니...

어미의 생명은 그렇게 나에게로 옮겨옵니다.....

아무래도 저는 이제 제 자신에게도 말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엄마를 부탁해...” 라고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8. 12. 10. 08:29

<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할레드 호세이니

 

책 이미지

 


할레드 호세이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의사 작가입니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이란, 프랑스 등에서 체류했던 그의 가족은 1979년 소련의 침공으로 조국이 공산국가로 변하자 이듬해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고 하네요.

2003년, 그는 첫 소설 <연을 쫓는 아이>를 발표했고(달동네 책거리에서 지난번에 소개했던 책이기도 하구요) 4년 후인  2007년 두 번째 소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발표했습니다.

전작이 아프가니스탄 남자의 이야기였다면 이 소설은 아프가니스탄에 남겨진 여성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말합니다.

“내 글쓰기가 아프가니스탄의 문제에 대한 논의를 일으켜 대중적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길 희망한다”라고.....

(그리고 그는 충분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단지 두 권의 책만으로도요....)


이 책에는 1959년부터 2003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의 끔찍했던 현대사를 관통해 온 두 여자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왜냐면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정말 현실이니까요.

자, 그럼 이제 그 두 여자를 만나볼까요?


* 마리암

모계의 지위가 자식에게 이어지는 아프가니스탄.

부잣집 하녀였던 어머니와 주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 마리암.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라미(후레자식)’란 이름으로 배척받는 아비 있는 사생아. 그것이 그녀의 위치였고 이름이었습니다.

가족에 편입되지 못하고 평생 좌절감에 몸부림치던 어머니 나나는 마리암이 열다섯 되던 해 딸이 아비의 집을 찾아가 그 집 앞에서 밤을 지세우던 날 자살을 합니다.

어머니는 두려웠겠죠. 혹시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리고 딸의 곧 느끼게 될 현실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거부 그리고 말로 표현되어질 수 없는 모든 것들이요...

혼자가 된 마리암은 아버지의 본가에서 잠시 생활하지만, 그들에게 이 아이는 단지 망신스럽고 부끄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그들은 마치 엄청난 은혜인양 서른 살 많은 홀아비 구두공 라시드에게 그녀를 시집보냅니다. 마리암의 나이 15살, 라시드는 45살....

남편(이 말의 끔찍스러움이여~~~) 라시드는 처음엔 다정했습니다.

아들을 몹시 바라던 그는 마리암의 유산이 계속되자 점점 본성을 드러내게 되죠.

폭행과 학대의 끝없는 시작...(이 단어는 그러나 절대...절대...절대로 부족한 표현입니다....)

밥을 제대로 짓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마리암에게 조약돌을 씹으라고 합니다.

마리암은 눈물을 흘리며 입 안에서 조약돌과 함께 자신의 부러지는 이를 함께 씹게 됩니다.

그녀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는 전혀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이게 그녀의 삶입니다. 어쩌면 평생 동안 이어질지도 모르는.....


* 라일라

9살 라일라는 두 오빠가 전쟁터로 끌러가기 전까진 행복한 아이, 그리고 다정한 가정을 가지고 있던 사랑스런 어린 아이였습니다.

두 아들을 읽은 라일라의 엄마는 소련의 몰락만을 희망으로 아무 의미도 가치도 느끼지 않고 살아갑니다. 소련의 몰락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카불을 떠날 준비를 하던 그들의 집으로 떨어지는 로켓 유탄.....

잃어버린 한쪽 청력과 그리고 사랑하는 티리크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그녀의 의식은 점점 흐려집니다. 

마리암과 라시드에 의해 구출되는 라일라는 그들의 집에서 잠시 생활하게 되죠.

그리고 며칠 후 타리크가 피난길에 나머지 한쪽 다리도 잃고(한쪽은 이미 지뢰폭발로 잃어 의족을 하고 있었죠)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모두 라시드가 꾸며낸 거짓말이었습니다)

이제 그녀도 혼자 남습니다.

(참고로 1996년 집권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세력은, 여성들의 교육 및 취업 기회를 완전히 박탈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가리는 부르카를 착용하지 않은 채 집 밖으로 나온 여성들에게는 집단폭행을 가하는 등 극단적인 여성차별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절망한 라일라에게 라시드는 자신의 두 번째 부인이 되든, 거리로 나가든 선택을 하라고 말합니다. 거리는 강간과 살육이 범람하는 지옥으로 변한 지 이미 오래죠. 라일라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그녀의 몸 속엔 지켜내야 할 생명이 있었으니까요.

15살의 나이에 환갑도 넘긴 남자의 후처가 된 라일라....


증오의 상대로 만나게 된 마리암과 라일라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편과 종교 근본주의로 퇴행한 사회와 맞닥뜨리면서 점차 동지적 관계를 맺게 됩니다.

남성의 소유물로 남성에 의지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들이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남성들에게 부여된 이러한 우월적 지위가 전쟁의 혼란 상황과 맞물리면서 남성의 가학적 폭력성은 가정 내에서 무자비한 폭력과 학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그것을 고스란히 당하게 되죠, 즉 이 책의 두 주인공이 그 희생물의 대표적 전형인 셈입니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엄청난 나이차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두 여인은 남편의 폭력을 똑같이 감내해야 하는 같은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처음엔 서로 증오하고 미워하고 대면대면했던 그녀들은 점점 같은 상황을 감내하는 아프가니스탄에 남겨진 여인으로 동지애를 느끼게 되죠.

특히 라일라에게 자식이 생기면서 마리암은 그들 모두에게 진한 모정을 갖게 됩니다.

결국 남편의 극단적 폭력과 학대로 죽음 직전까지 몰린 라일라를 구하기 위해 마리암은 남편을 살해하게 되죠. 그리고 자신의 아들딸들을 살리기 위해 라일라를 그녀의 옛 애인 타리크와 탈출시키고 모든 죄를 스스로 감당하며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타리크와 행복한 새 삶을 살던 라일라는 결국 탈레반이 미군에 쫓겨 북부로 달아난 시점에 자신의 고국 아프가니스탄으로 되돌아옵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 앙상한 뼈다귀만 남겨준 그 폐허의 현장으로요.

아마도 라일라는 자신만의 편안한 삶을 위해 남은 생을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다시 폭력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길일지라도 그녀를 필요로 하는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아들딸들의 소리를 외면할 수는 도저히 없었겠죠. 

그녀는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 마리암이 자신의 마음속에 심어준 찬란한 사랑을 나눠줄 것입이다.

이제 이 책의 제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라일라의 베품 속에서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계속 떠오르게 되겠죠.....

벽 뒤에 숨어서도 떠오를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요...


이 소설을 결코 편하게 읽을 수는 도저히 없는 책입니다.

통곡을 하게 만드는 그래서 솔직히 책을 읽는 중간중간 참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아픈 책을 꼭 읽어야 하느냐고 물으면서요...

혹 누가 제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저는,

네, 꼭 읽어달라고, 그리고 제발 제발 제발 읽어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 우울해서, 너무 안타까워서, 너무 서러워서, 그리고 너무 아파서 그래서 끝없이 내 온 몸이 침몰하는 느낌이 든다고 해도 꼭 읽어 보라고요....

끝없이 가라앉더라도 그 바닥에 도달하면 마침내는 그 깊은 곳을 차고 올라올 수 있게 만드는 책이니까요.

그리고 느끼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다행인 존재고, 그리고 행복한 존재고, 그리고 아름다운 존재인지를요...

책 장을 덮으면서,

부르카로 나를 가리지 않겠다고 그리고 어떤 분노에든 약해지지 않겠다고 저 또한 함께 다짐했습니다.

저는 참 행복하고 다행한 사람입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