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유럽을 좋아하는 이유는,
골목을 돌때마다 나타나는 크고 작은 광장들 때문이었다.
첫 유럽 여행때 골목을 돌어서는데 느닷없이 광장이 나타나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골목길을 들어설때마다
혹시 이 다음에 광장이 나오는건 아닌가 은근히 기대하는 정도까지 됐다.
햇빛이 사태처럼 쏟아지는 광장도 아름답고,
갑자기 내리붓는 비로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텅빈 광장도 아름답고,
계단에 앉아 삼삼오오 이야기를 사람을의 뒷모습을 훔쳐 보는 것도 즐겁다.
피렌체에 있는 동안,
그야말로 하루에도 열 두 번은 더 지나갔던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은
내겐 아주 강력하고 확실한 랜드마크였다.
길을 잃으면 항상 베키오 궁의 길다란 종탑부터 찾았고
그렇게 시뇨리아 광장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면 길은 언제나 새롭게 열렸다.
광장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
이 궁전은 요새의 기능도 했었다는데
그래선지 스페인에서 익숙하게 봤던 알카사르처럼 벽 끝의 모양이 볼록볼록하다.
현재는 일부는 정부 청사로 사용되고 있고
일부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데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베키오 궁전의 친퀘첸토홀 천장화가 그렇게 아름답다는데...)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는 곳답게
이곳 입구도 메디치 가문의 상징인 사자 조각이 좌우로 웅립해있다.
광장 한켠엔 이탈리아 종교 개혁자 사보나롤라 수도가가 화형당한 장소를 알려주는 둥그런 표지도 눈에 띈다.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는
교회의 권위와 귀족정치를 반대한 인물로
교회와 메디치 가문과의 충돌이 잦았던 수도사였다.
결국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고 메디치 가의 모략으로 민심까지 잃으면서
1498년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을 당하기에 이른다.
위의 그림은 사보나롤라 화형식을 그린 그림이다.
그가 주장한 종교개혁 중에는 "동성애 금지"도 있었다는데
당시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은 공공연하게 동성애에 빠져 있어서
사보나롤라의 개혁이 눈에 가시처럼 느껴졌을테다.
사실 사보나롤라가 수도사로 피렌체에 처음 오게 된 것도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수도사가 있다는 보고를 받은 가문의 수장 로렌초가
사보나롤라를 바로 눈 앞에서 감시하기 위해 일부러 피렌체로 오게 만들었다.
두 사람 사이의 엎치락 뒷치락하는 권력 이동으로 피렌체는 한동안 몸살을 앓게 되고
어찌됐든 표면상 최후의 승자는 메디차 가문에게 돌아갔다.
사보나롤라는 베키오 궁전의 기다란 종탑에 갇히게 됐고
일종의 "마녀사냥"처럼 피렌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화형을 당한다.
"사보나롤라는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부당한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으며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기념비를 세운다..."
시뇨리아 광장의 둥그란 표지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은 이렇다.
하지만 교황까지 배출한 엄청난 메디치가문도 결국은 후사가 없어 대가 끊기게되니
사보나롤라의 저주 운운하는 소문이 생길만도 했겠다..
베키오 궁전 왼편에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상이 위풍당당하게 서있다.
바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아쉽게도 모사품이고 진품은 아카데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다비드상은 미켈란젤로가 제작할 당시 두오모 대성당 버팀목 높은곳에 설치될 예정이었단다.
그런데 완성시키고 보니 조각상의 크기와 무게가 문제가 돼서 베키오 궁전으로 설치 장소가 바뀌게 된다.
다비드의 손과 머리 비율이 어긋나게 보요지는 이유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각으로 제작됐기 때문이라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미켈란젤로의 정확성이여!)
오른쪽에는 헤라클레스 조각상이 있는데 다비드상의 유명세에 밀려 어딘지 주눅이 들어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돌리면 회랑 "란치 로지아(Goggia del Lanzi)" 조각상들이 무더기로 여행자들의 시선을 강탈한다.
사방이 뻥 뚫린 곳이라 전부 모사품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두 작품만 제외하면 나머지 전부 진품이란다.
(사자상이랑... 다른 하나는... 기억이 안 난다... ㅠ.ㅠ)
란치 로리아 회랑의 대리석 조각상은 낮에 보는 것도 물론 좋은데
해가 질 때쯤 찾아가면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시작될 때,
회랑 뒷쪽으로 깊숙히 들어가 점점 변하는 하늘빛과 함께 조각상의 뒷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나도 이곳에 조각상으로 영원히 서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특히 첼리니의 청동상 "페르세우스"의 뒷모습은... 너무 황홀해서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을 정도다.
시뇨리아 광장 분수대의 거대한 포세이돈 조각상도,
그대로 달려 나갈 것 같은 생동감으로 가득한 코시모 1세 청동상도,
미켈란젤로의 걸착 다비드도,
그 순간만큼은 메두사의 목을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의 당당함을 이길 수 없었다.
은은한 조명아래 그대로 별빛처럼 장엄하게 빛나던 "페르세우스" 덕분에
다른 숱한 조각상들이 조연으로 잠시 자리를 내준다.
열심히 찾아본 백과사전적인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더라.
"타이밍"
가장 중요한건 내가 직접 눈을 마주치는 그 시점이더라.
그게 걸작을 만들고 감동을 만든다.
시뇨리아 광장.
내게 장엄한 걸작을 선사한 이곳이
피렌체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바로 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