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0. 10. 28. 05:54
며칠 여행을 다녀왔다.
혼자 눈으로 쫒으며 걸었던 흙길은 충분히 포근했고
그 길에서 마주친 기백년된 나무와 쇠락한 사당들, 고택들은 신성하고 그윽했다.
처음엔 부러움 때문에 못된 심통이 일어 그만 덮어버리고 싶은 여행이었다.
그런데 눈으로 쫒는 한걸음 한걸음에 그만 내가 넋이 나갔나보다.
팍팍했던 무릎팍에 힘이 주면서 계속 걷자, 계속 걷자며
나도 모르게 스스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직접 걸어볼 깜냥도 안 된다면
그래, 이 여행도 그리 억지는 아니라며 나를 다독이면서...



책 속에는 꼭 걸어봐야 할 대한민국 아름다운 길 50 곳이 소개되어 있다.
별로 친절하게 세세한 코스를 이야기해주는 것도 아닌고
눈에 확 띄는 아름다운 풍경 사진이 지천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꼭 내 두 발로 함께 걷고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래서 촘촘한 글자에 꽤 무거운 책의 무게를 감당하면서도
이틀동안 지하철 안에서 읽어냈던 건지도 모르겠다.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아우르는 50 곳의 도보 여행지.
짧게는 3시간에서 길게는 무려 14시간을 걸리는 트레킹 코스를 소개하면서
중간중간 시나 옛글들을 운치있게 배치한 게 또 소박하고 정겹다.
세월과 함께 버려진 역사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걷다보면 보전되지 못하고 방치된 옛 것들이 꼭 말을 걸어오는 것 같지 않을까?
나도 한 번 기억해달라고...



몰랐었다.
서울 근교에도 걷기 좋은 곳이 이렇게 많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길 속에 숨겨진 이야기가 또 그렇게 많다는 것도
억울한 생각이 들만큼 내내 몰랐다.
꼭 지리산 둘레길이나 제주도 올레길이 아니라도
서울 근교에도 일부러 공을 들여 걸을 길이 얼마나 많던지...
서울 성곽, 북한산성, 남한산성 오름길도
사라진 나룻터를 떠올리며 한강 따라 걷는 물길도
라이브 카페만 떠올리는 양수리에서 광나루까지의
물안개 자욱한 신비로운 아침길도
조금만 바지런을 떨면 두 발로 걸어 느낄 수 있었을텐데...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은
발부터 가장 바쁘 사람이 아닐까?
피터 한트케의 글처럼 "걷는 사람"만이 세상을 온전히 느낄 수 있으리라.
그래, 걷자!
지쳐서 무릎이 시큰할 때까지...
그 시큰함이 고된 상쾌함으로 온 몸을 쾌활하게 만들지도...


탈 것에 몸을 싣고 가면 나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걸을 때만 공간이 열리고 빈 공간들이 춤을 춘다!
걸으면서만 나는 나무에 달린 사롸로 몸을 돌릴 수 있다.
걷는 사람만이 머리가 어깨 위로 자라난다.
걷는 사람만이 자기 발에 발꿈치가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걷는 사람만이 육체를 통한 이동을 느낀다.
걷는 사람만이 높은 나무의 소리를 정확하게 듣는다.
정적을! 걷는 사람만이 만회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에게로 갈 수 있다.
걱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이 유효하다.

- 페터 한트케 <역사의 연필>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