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2. 3. 14. 06:28



입소문으로 들었던 <다, 그림이다>를 드디어 읽다.
책에 "드디어"라는 수식어를 달고 읽기 시작해서 그 느낌을 책을 덮을 때까지 그대로 가지고 갈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다.
전통 회화와 동양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감칠맛 나면서도 다정한 필력을 가진 손철주,
서양 미술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다양한 에피소드, 그리고 통찰을 가진 이주은.
두 사람이 주고 받는 편지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보는 재미가 참 많다.

1. 첫 번째, 그리움
2. 두 번째, 유혹
3. 세 번째, 성공과 좌절
4. 네 번째, 내가 누구인가
5. 다섯 번째, 나이
6. 여섯 번째, 행복
7. 일곱 번째, 일탈
8. 여덟 번째, 취미와 취향
9. 아홉 번째, 노는 남자와 여자
10. 열 번째, 어머니, 엄마

이 책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까지 포함해서 전부 67점의 그림이 담겨있다.
눈의 호사도 호사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편지글이 독립된 형태가 아니라 정말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연결된는 소통의 글이라는데 있다.
한 사람이 편지로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이 그 편지를 정성껏 읽고 찬찬히 생각한 후에
그에 상응하는 그림을 찾아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는 방식.
문득 비밀일기를 교환하는 사춘기 소녀의 감수성이 떠올라 나까지 괜히 수줍어진다.
손철주기 말하는 유혹의 종류(유혹, 매혹, 고혹)와
유혹의 단계(끌림 -> 쏠림 -> 꼴림 -> 홀림)에 절감하며
어쩌면 이렇게 글을 유익하고 재미나게 잘 쓸 수 있을까 감탄했다.
그래, 이 책은 뜻밖의 매혹으로 나를 유혹하더라.
이런 은근한 유혹이 치명적일 수 있다는 걸 또 한 번 절감했다.
손철주가 말하는 동양화란 이렇다.
닮지 않은 닮음, 그것이 참다운 닮음이다.
그림의 닮지 않음으로 실재의 닮음에 다가가는 것이 바로 동양화의 충심입니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단어 하나하나에 동양화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정이 그대로 느껴져 저절로 겸손해졌다)
이주은이 말하는 서양화는 또 어떻가!
서양의 그림은 공존하기 어려운 것을 동시에 보게 해주는 그 무엇일 것입니다.
서양 미술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그리는 대상을 설득력 있게 실물처럼 그리는 환영(iillusionism)일 겁니다.
모든 디테일이 완벽할 때에만 현실에 대한 강한 환영이 생겨날 수 있어요.
그러므로 환영의 본성은 세세한 완벽함입니다.


                                               엔드루 와이어스 <결혼>


                                           이인상 <와운>


                                           엔드루 와이어스 <비상>


                                           빈센트 반 고흐 <아몬드 꽃>


                   장 뒤뷔페 <사팔뜨기>                                               낭세령 <취서도>

마음으로 수직활강했던 그림들.
엔드루 와이어스의 그림은 때로는 공포를 때로는 호기로운 광활함을 안긴다.
<비상>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신비하게도 옆구리가 간지러워진다.
순간 저 독수리의 날개와 눈을 단호히 훔치고도 싶어졌다.
이인상의 <와운>은 내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아 혼자 민망해 웃었고
고흐의 <아몬드꽃>에 담긴 조카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 또 덜컥 공감하며 웃었다.
(아마 고흐도 나처럼 조카바보였나보다. 하긴 사랑하는 동생 태오의 자식이었는데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장 뒤뷔페의 <사팔뜨기>는 낯선 신비감에 자세히 들여다봤는데
그 하나하나가 나비 날개를 찢어부친 콜라주라니 문득 섬득해진다.
선교사로 중국에 왔다가 3대에 걸쳐 중국 황제를 모시는 궁정화가가 됐다는 이탈리아인 낭세령.
그의 <취서도>는 동양화와 서양화가 묘하게 뒤섞여 있어 독특한 운치를 준다.

그림이란 그런 것인가?
그리움을 향한 세세한 닮음.
그걸 동양화는 여백으로, 서양화는 디테일로 표현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좁은 깜냥으로 그림 속 그 무궁무진한 디테일과 품은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겠지만
그저 찬찬히 들여다봄으로써 다른 곳을 꿈꿔볼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림은 환영(幻影)을 환영(歡迎)한다.
그런 이유로 그림은,
그리는 자도, 보는 자도, 읽는 자도 모두 환(幻)쟁이로 만든다.
책장을 넘기면서,
보여지는 그림 앞에 외경심으로 잠시 멈짓했고
읽혀지는 그림 앞에 황홀경으로 오래 머물렸다.
아! 보이는 것을 읽는 것은 이렇게 곡진하구나.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