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책거리2010. 1. 25. 06:16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 최영미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나이를 깨닫고 살기엔 너무 어렸던 나의 20대 초반에 만났던 책입니다. 그 시집 앞에서 전 오지 않을 30대를 비웃듯 좀처럼 공감하기 힘들다 혼자 결정하고 책꽃이 한 켠에 방치하듯 내버려뒀더랬습니다.

나중에... 나중에... 그래 “서른”이 되면 그때 한 번 읽어주리라.

아마도 꽤나 거만한 다짐을 했었겠죠.

그리고... 정작 서른이 됐을 때는 까맣게 그 책을 잊어버렸고, “서른”을 지나버린 지금은 차마 두려워 책장의 표지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십대였을 때 나는 나에게 삼십대의 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거라 호기있게 믿었었는데...

시인 “최영미”

그렇게 제때 읽지 못해 놓쳐버린 그녀의 시들은 아직까지도 제겐 조목조목 무안함과 면목 없음으로 남아 책꽃이 한 켠에서 물그러미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치 뭉턱뭉턱 시간이 통째로 도려내진 것 같은 휑한 느낌.

그런데  때로 그 느낌은 실제로 내 살점의 일부가 뜯기는 것처럼 저릿저릿 아프고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여행집 신간으로 소개된 이 책이 눈에 들어왔던 건 아마도 작가에 대한 저의 이런 막연한 부채감이 한 몫 했으리라 짐작됩니다.

부채가 눈덩이처럼 쌓여 빚더미에 앉기 전에 이번엔 제때 읽어내리라 다짐하게 됐는지도...

작가 최영미는 이 책의 표지에 산문집이라고 책의 소속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단어 선택은 정말이지 솔직하고 정직했습니다.

이 책에는 여행지의 흥분감과 낯섬, 그리고 이국을 향하는 신비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행지를 담은 그 흔한 사진조차 만나기 어렵죠.

여행은 “존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기”위한 과정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삶과 사람을 기꺼이 만나 철저히 홀로 대화하고 소통하고 있습니다.

여행은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로 떠나는 것 또한 포함된다고 낮게 이야기하고 있죠. 

조곤조곤한 독백같은 대화들.

책을 읽는 내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말이죠.

1부 "아름다움에의 망명"은 그녀가 그동안 국내의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한 여행과 관련된 글들을 성실히 모아놓은 부분입니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작가 최영미가 아니라 서울대 미대와 홍익대 미술대학원을 거친 미술학자로서의 그녀의 근원을 만날 수 있죠.

그녀에게 "미술"은 그러니까 영원한 노스텔지아인 셈입니다. 

불편해진 손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미술의 정교함과 세밀함을 그녀는 글을 통해 대신 그려내기로 작정한 듯 보입니다.

2부 "예술가의 초상"은  문학, 미술, 영화 등 문화 전반에 대한 그녀의 짧은 사색과  개인적인 담론들이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겨진 이야기들과 위대한 예술가들의 애뜻한 비화들도 만날 수 있죠.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사귐의 글들까지도요.
솔직히 최영미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좀처럼 믿어지지 않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작가 "최영미"를 그저 여류시인으로만 기억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선입견을 가진 삐뚜름한 시선이었죠.
여성을 글은 날카롭지 않고,  대담하지 않고, 그리고 체계적이고 치열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담긴 글들...
삶이 치열하다는 걸, 하루하루가 생명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간절할 수 있다는 걸 가슴 뻐근하게 느끼게 합니다. 그것도 제겐 너무 치명적으로 잔잔하게...


오십을 앞에 둔 한 여자가 말합니다.

"여행과 스포츠는 내 삶이 다하도록 나와 함께 할 정열이다"

단지 이 말만으로도 지독히 그리고 강렬히 그녀가 부러워 야만의 짐승처럼 그녀의 사지를 물어뜯고 싶었다면 이해가 되실까요?

진심으로 저는 그러고 싶었습니다.
저 또한 그랬노라, 간절히 그래보고 싶었노라 그녀를 향해 발악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여행지에서 할 일 없이 톡톡 손발톱을 깎으며, 발뒷꿈치의 오랜 각질을 정성껏 밀어내며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밀린 일기를 쓰고 싶었다고...

호들갑스럽게 유명 여행지를 눈도장찍듯 훓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가슴에 담긴 한 곳에 예정없이 머물면서 감정이 바닥날 때까지 그렇게 정착하듯 일상을 보내고 싶었다고... 

아직도 계속 건축중인 가우디 성당 앞에서,

미켈란젤로의 가죽을 들고 있는 섬뜩한 장면이 숨어있는 "최후의 심판" 앞에서.

나 또한 꾸역꾸역 밀려오는 졸음처럼 나른한 시간들을 오랫동안 보내고 싶었노라고...

내 눈 속에만 보이는 보물을 가슴에 숨기며 그렇게 애뜻하게, 그렇게 가슴 뻐근하게 그러면서도 잠시 무료하게 삶을 살아내고 싶었노라고...
그러나 그 꿈들이 내겐
항상 인류멸망의 최후보다 더 요원하고 늘 가팔라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노라고...


문득 그녀의 글들을 읽으며
저는 오래 참았던 숨을 크게 쉬어 봅니다.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라고 그녀가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너무 겁쟁이가 되어버린 저는 알던 길도 잃을까봐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살아갑니다.
정직하게 사랑하지 못했음으로 청춘을 잃은 사람.
그래서 젊은 적이 없기에 늙을 수도 없는 사람.
이 책을 읽는 저의 시선이 꼭 이랬음을 고백하게 되네요.
마음 안에 또 다시 굵은 매듭이 한 줄 묶이는 걸 느낍니다.
"예술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예술에 집착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다네"
화가 세잔은 에밀 졸라의 이 말에 상처를 받고 그후로 죽을 때까지 세상과 등지고 살았다네요.
세상에 너무 많이 집착하며 살고 있는 저는 이제 무엇과 등지고 살아야 할까요?
책장을 덮은 마음 끝이 내내 묵직합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