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거닐다> - 전소연
“가만히” 무언가를 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솔직히 말해서 제목에서 느껴지는 심한 질투감이 이 책을 손에 잡게 했습니다. 표지에 담긴 사진도 한몫을 했다는 말도 함께 전합니다.
가만히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사람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또 한 사람, 그리고 약간은 몽롱한 느낌을 주는 그런 나른함까지.
오래 쳐다보니 마치 사진을 찍은 사람이 바로 나인 것만 같은 느낌도 듭니다.
책을 보면서 이런 동질감을 대면해야 한다는 건 확실히 당황스러운 일이죠.
1979년생 전소연.
본명보다 티양(Teeyang)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는 여자, 몇 번의 사진전과 그녀 이름의 책 몇 권까지 가지고 있는 엘리스같은 여자 전소연.
그녀가 교토와 오사카를 여행하고 책을 낸 2009년 그 시간에 저 역시도 간사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내려 고베로 향하고 있었죠.
그녀처럼 가만가만 여행하지 못했고 발바닥에 불이 난 것처럼 매 시간을 서두르며 최대한 많이 보리라 다짐했던 수다스러운 여행이었습니다.
늘 부르튼 발과 낯선 장소에서의 잠이 달았을리 없었고 5일 동안 밤마다 불면과 피곤과 한판 대결해야하는 고단한 시간들의 연속이었죠.
그래도 아직 선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Welcome to KANSAI"
그 문구 밑에 동그랗게 담겨있던 간사이 지역의 모습들.
허둥거리던 여행자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던 또렷한 기억.
흔히 도쿄의 번잡함을 벗어나 한적하고 여유로운 여행을 원하는 이들이 선택하는 곳이 바로 간사이지방이라고 합니다. 이국적인 풍경과 전통적인 일본의 모습을 함께 담고 있는 곳, 그러면서 일상의 편안함까지 느낄 수 있는 곳 간사이.
간사이에서 그녀는 여행이 아닌 생의 빈틈을 찾아 차분한 한걸음 한걸음의 산책을 시도합니다. 기억을 걷는 듯한 그녀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일상처럼 잔잔하고 사소하게 머무는 여행, 그리고 사소한 시선 하나로 일상이 충만해지는 그런 여행을 하고 있는 그녀의 호흡은 깊고 단정했습니다.
낯선 누군가를 보던 시선은 어느새 책과 잘 어울리는 손을 가지고 있던 당신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고 그렇게 기억 속을 서성이다보면 어느새 울렁증이 멀미처럼 찾아오죠.
속도를 줄인 여행이 주는 긴 여운...
“...... 어쩌면 여행지를 선택하는 일은 운명과도 같다. 시기적절하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곳에 가야지’라는 생각이 스미게 되면 그곳에 가야 하는 운명이 되고 마는 것이다...... 어떻게든 마련하고 싶은 내 생의 빈틈은 ‘산책’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때로는 ‘여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행은 단순히 낯선 지역으로 가서 다른 일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공간에 가서 일상을 천천히 다시 만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산책과도 같은 매력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산책을 기록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녀의 기록은 “오전-오후-저녁-밤새벽”의 이름을 달고 일상의 하루를 꼭꼭 집어내 일기를 쓰듯 적어갑니다.
몰래 훔쳐본 누군가의 일기에서 나를 만나는 기분이란,
때론 섬뜩하기도 하고, 때론 다행이다 싶어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합니다.
그래 적어도 기다림을 잔인하고 버겁게 여기는 게 나 뿐만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
그리고 그 느낌들이 고스란히 풀어진 사진들.
“......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나와 당신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야기가 시작될 때까지 나는 당신을 지켜볼 것이고 가끔씩 미소를 보내기도 할 것이다. 당신과 나와의 거리는 가까워지거나 혹은 멀어질 것이다. 그러나 가깝고 먼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당신이 내 뷰파인더 안에 있느냐 없느냐이다. 당신 주변을 서성거리던 나는 호흡을 멈추고 셔터를 누르게 될 것이다. 당신과 나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결정적인 순간은 불과 몇 초 안에 찾아온다. 그러니 타이밍을 놓치지 말자. 사랑이든 사진이든 타이밍이 문제다..... ”
그녀가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면 어딘가 엘리스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을 것만 같습니다.
촘촘하지도 않고 오히려 어딘가 엉성해 보이기까지 한 그녀의 사진.
그 비어있는 여백이 그녀의 산책과 아주 많이 닮아 있어 보는 내내 따뜻했습니다.
뷰파인더로 세상을 만나는 일은.
늘 손끝을 떨리게 만드는 흥분이며 분주함입니다.
그 작은 뷰파인더 안에서 찍는 사람의 눈은 그러나 더 많은 걸 보고 더 많은 걸 알아챕니다. 그리고 기록을 다짐하죠.
그녀가 찍은 기록들을 보면서 그 밑에 하나하나 나의 기록들을 적어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요. 사진.
“찰칵” 소리와 함께 그대로 고정되는 한 세계.
그러나 찍힘으로해서 다시 새롭게 시작되는 또 한 세계.
사진을 찍으면서 저는 항상 방금 전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를 생각합니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은 짧지만 이젠 점점 더 차이가 생기고 멀어질 세상.
여행은...
그러니까 어쩌면 보기 위해 떠나는 것도, 비우기 위해 떠나는 것도, 그래서 다시 채우기 위해 떠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계속 사는 거죠.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짧게 또는 길게 그것도 아니라면 기약 없이 살아가는 것.
기다림을 지우기 위해 나 자신을 조금씩 잃어버리면서 다시 또 살아가는 것.
어디에도 하염없이 나를 기다릴 마음 한 조각 흘리지 않고 살아가는 여행.
오랜 불면이 시작되면 저는 습관처럼 여행을 꿈꾸게 됩니다.
그 꿈이 만든 많은 생각들이 또 잠을 엉키게 하네요.
솔직히 한동안 낯선 여행지를 홀로 방황하는 독서가가 되는 건 아닐까 싶어 덜컥 겁이 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허덕이며 관광지를 읽어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죠.
그녀가 혹은 그가 다녀온 곳을 저는 꿈꾸고 싶지 않습니다.
빈틈을 향한 산책같은 여행도 그 끝은 있을테죠.
내 불면의 밤들을 그들이 차곡차곡 다독이며 위로합니다.
이제 조만간 불면의 산책도 제자리로 돌아와 잠을 청하게 되지 않을까요?
봄이 오면,
나른한 햇빛 속으로 졸음같은 산책을 떠나야겠습니다.
아마도 발걸음도 꾸벅꾸벅 졸게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