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0. 7. 6. 05:36
오랫만에 괜찮은 팩션소설을 읽다
울어내지 못하고 몸 안에 담겨 있는 울음을 한 장 한 장 읽어내는 느낌은
참담하기도 했고 그리고 거침없이 모욕적이기도 했다.
힘이 없는 나라의 세자라는 위치가,
굴욕적인 패배로 아비는 남한산성에서 머리를 땅에 조아려야 했고
아들은 볼모라는 이름으로 그 아비의 나라를 떠나야만 했다는 사실이
참 아프고 서럽다.
10년이 세월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비의 의심은 결국 세자의 목숨까지 허망하게 만든어 버린다.
고작 두 달을 살자고 아들은 굴욕의 시간을 견뎌냈던가!



세자는 아프고 싶지 않았고 아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그 아픔을 호소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프다 말하지 않고, 호소하는 상소도 올리지 않고 선뜻 따라나서면 조선의 임금은 그런 세자를 가상하다 하실 것인가. 그래서 세자는 가고 싶지 않은 길을 떠나는 애통한 마음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에 오른 인조.
명나라를 숭배하는 조선은 변발을 하는 청을 오랑캐라 취급하며 멸시했다.
그러나 청에게 굴욕적인 모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내어주기에 이른 조선.
아비에게 스스로 청으로 가겠노라 세자는 말했지만
소현의 심정은 얼마나 절절하고 아득했을까?
기댈 곳 없는 적의 땅으로 끌려가는 세자의 단정한 아픔은
오히려 역사보다 길고 역사보다 아프다.
아비는 잠시 환궁한 아들에게 말한다.

내가 백성을 생각한다. 사저를 떠나던 그 순간부터 내가 그러했다. 백성들이 전란에 다치고 주렸다. 그 피맺힌 울음소리가 한시도 내 귀를 떠나지 않으니 내 살이 아팠다. 내 살에 베어 백성들을 먹일 수 있으면 그리했으리라. 내 목을 내주어 백성들을 살릴 수 있다면 내가 그래했으리라.
멀리 떠나 있는 아들을 생각할 때도 내가 몸이 아팠다. 베어내지 못하는 살이 붙어 있는 자리에서 아팠다. 내가 너를 생각하면 몸이 더욱 아팠다. 불로 지진 침을 맞아도그 아픔이 가시지 않다.
울거라. 네 몸에 울음이 가득할 것이다.


이런 아비였는데 무슨 이유로 아들이 환국해 돌아왔을 때 살갑게 대하지 못했을까?
공식적인 소현세자의 사망원인은 학질로 기록되어 있지만
아비에 의해 아들이 죽임을 당했으리라는 의혹이 지배적이다.
소현세자가 죽고 세자빈과 그 자식들까지도 몰살되는 참상을 겪었으니
차라리 소현세자의 처지가 덜 괴괴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인조는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자신이 광해군을 치고 왕위에 올랐듯 아들이 청의 세력을 입고
혁명이라도 하리라 믿어버렸을까?
역사라는 게, 왕의 역사라는 게 오히려 끔찍한 오명처럼 다가온다.

역모에 세자의 이름이 오르내렸다고 했다. 그 진위가 어떠하든 간에 조선의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어느 임금에게 적이 아닌 자식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 수위가 역모에 이를 정도로 높아졌으니, 세자의 입지가 더할 수 없이 위험한 정도에 이르렀음은 분명한 일이었다.
... 세자가 역모에 올랐어도, 오르지 않았어도 이미 임금의 적인 것이다.


이런 아비와 아들의 관계라니...
고되고 아프다.



이긴 자와 진 자의 자리가 다르다는 것을, 완전히 굴복해보지 않은 자는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진 자의 자리는 바닥이 아니라 바닥 아래보다 더 낮은 곳이었다. 더는 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그 자리가 바로 죽음이었다. 하나의 생이 그때에 끝났고, 또 하나의 생이 그때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벌판에 세워져 있던 또 하나의 막차 안에서 패국의 세자는 언젠가 그들의 자리가 바뀌게 될 나라를 기다렸던 것이다. 자신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기다려도 안 된다면 그 다음 생에, 그 다음 생이 있을 것이다. 조선이 살아남는다면 결국 그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자의 염원이었다.

세자의 염원을 읽어내는 대목은 목울대마저 아프다.
죽어야 했으나 죽지 못한 자의 시간은 더 이상 어디에도 속한 시간이 아니라고 했던가!
전쟁의 시대보다 무서운 것이 정치의 시대란다.
전쟁은 오직 죽음을 위해 있지만 정치는 죽음까지 농락하기에...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남고
남은 정치 속에서는 누구에게도 영원한 안식이란 없을 것이란다.
과거의 역사가 그대로 현실로 맛물리는 걸 바라보며
팩션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세계가 나는 더 암담하고 아득해진다.
타국에 의한 굴욕이 아니라 자국에 의해 굴욕스러워지는 지금 이 순간들...
어쩌면 우리도 "학질"이라는 병명으로
계속 타살 당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우리의 지금 역사도 팩션이 될까?
허구의 역사에 살고 있는 지금을 실감하면서 읽어낸 책은
한 장 한 장이 긴 한숨 섞인 고단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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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가 책 속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이야기도 그렇고 문체도 그렇고 김훈의 <남한산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느낌이 참 다르다.
정확히 말해서 <남한산성>이 인조의 입장에서 쓴 글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인조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청나라에 10년간 볼모로 잡혀있던 아들의 심정에 대한 글이고...
두 책을 함께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쳤던 부분들을 다시 볼 수 있게 하지 않을까 싶어서...
조만간 <남한산성>을 다시 한 번 꺼내봐야 할 것 같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