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끄적 끄적...2010. 2. 25. 06:00

오늘 같은 날씨에 읽기에 딱 좋은 소설.
그동안 폴 오스터의 책들을 그래도 꽤 읽었고
그 책들 모두 재미있었지만
이번에 읽은 <환상의 책>이 제일 마음에 든다.
왠지 묘한 이질감과 미궁 속에 빠지는 느낌.
책을 읽는 내내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의 "미궁"을 떠올렸다.
그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괴기스러운 음악을 차마 끌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말 그대로 나는 완전히, 그리고 완벽히 얼어있었다.
그대로 고정돼버렸던 무시무시한 기억.
내가 간직한 최고의 아름답고도 섬뜩하고도 그리고 끔찍했던 음악 "미궁"
물론 그 정도의 충격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이 책도 왠지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관음의 시선과 귀를 갖게 한다.



"Book of illusion"
원제가 더 매력적이고 직접적인 책.
"illusion"이라는 뜻에는 왠지 은밀하고 비밀스런 느낌이 있는데
"환상"이라고 번역했을 땐 왠지 허황된 눈속임같은 느낌가 강하다.
그래서 번역된 책을 볼 때는 항상 그 원제를 찾아보는 게 중요한 포인트!
탐정소설과 연예소설이 영화적으로 뒤섞여 있는 책.
책을 보면서 스크린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책.
그러면서도 열렬히
인간의 주체성과 자아에 대한 깊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만드는 책.
스스로에 대한 진실성에 연타를 가한다.
그래서 읽는 사람을 당혹하고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는 책.



오래 전에 실종된 무성 코메디 영화배우 헥터 만과
평행이론 같은 삶을 사는 대학교수이자 작가 데이비드 짐머.
그 두 사람의 같지만 다른 이야기, 그리고 추적과 멈춤, 끌어당김과 거부들...
책의 시작에는 샤토브리앙의 글이 헌사처럼 적혀있다.
......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끝에서 끝까지 이르는 여러 다른 삶을 살며 그것이 바로 비극의 원인이다 ..... 

비극적이면서도 동시에 유쾌한 희망을 함께 건네는 결말에
유난히 나는 신나했다.
"믿거나 말거나"의 뉘앙스로 끝을 맺는 폴 오스터의 글들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모든 이야기가 마치 사실이었던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어딘가  헥터 만이 출연한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적인 삶>, <투명 인간> 같은 영화가 있을 것만 같고
어딘가 데이비드 짐머가 쓴 <헥터 만의 무성 세계>라는 책이 있을 것만 같아
그것들을 찾아 나서고 싶은 욕구마저 안긴다.
마치 삼원색 같은 책,
그러면서도 어느새 무지개의 다채로움까지 선사한다.
폴 오스터의 세계.
늘 유사하면서도 결코 한번도 같지 않았던 그의 세계.
그가 만들어내는 환상의 세계들이 나는 아직도 많이 궁금하다.



그의 세계를 하나하나 섭렵해나가는 재미는 그래서 항상 새롭고 신비롭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읽은 세계들이 더 많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책을 읽게 되는 이유는
내게 늘 실종을 꿈꾸게 한다는 사실.
그게 포인트다. ^^

<국내에 소개된 폴 오스터의 작품>

  • 고독의 발명 (The Invention of Solitude) (1982)
  • 뉴욕 삼부작 (The New York Trilogy) (1987)
  • 폐허의 도시 (In The Country of Last Things) (1987)
  • 달의 궁전 (Moon Palace) (1989)
  • 우연의 음악 (The Music of Chance) (1990)
  • 거대한 괴물 (Leviathan) (1992)
  •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Auggie Wren's Christmas Story) (1992)
  • 공중 곡예사 (Mr. Vertigo) (1994)
  • 빵굽는 타자기 (Hand To Mouth) (1997)
  • 동행 (Timbuktu) (1999)
  • 환상의 책 (The Book of Illusions) (2002)
  • 신탁의 밤 (Oracle Night) (2004)
  • 브루클린 풍자극 (The Brooklyn Follies) (2005)
  • 어둠속의 남자 (Man in the Dark) (2008)
  •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