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시 45분.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한다.
보겔도, 보힌도 오래 머물지 않았던 이유는
혹시라도 빈트가르(Vintgar) 협곡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블레드에서 보겔과 보힌, 그리고 다시 블레드로 돌아가 빈트가르 들렀다 류블라냐까지...
가능하지 않은 일정이긴 했지만 혹시나 싶었는데
비가 오는 걸 보고 힘들겠구나 생각됐다.
저 멀리 잔뜩 흐린 하늘 아래 보이는 보겔산을 향해
나홀로 작별인사를 하고 버스를 기다렸다.
다행히 버스는 금방 왔다.
운전기사분께 버스티켓(3.60uro)을 사고 자리에 앉은 시간은 오후 1시 55분.
버스에 앉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타이밍 참 좋았다.
예전 대관령길을 생각나게 하는 꾸불꾸불한 산길을
운전하는 기사님의 솜씨는 가히 예술적이더라.
블레드에 가까울수록 흐렸던 하늘도 점점 맑아져
또 다시 빈트가르 협곡을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생겼다.
다리상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아주 가학적인 기대감.
게다가 블레드 정류장을 잘 못 내리는 바람에
호수 1/3 바퀴를 또 다시 걸어야했다.
다행히 비는 멈췄지만,
절뚝거리는 다리는 너덜거린다.
뭐 죽지야 않겠지만...
(그런데...솔직히 정말 죽을 것 같긴 했다.)
게스트 하우스에 맡긴 짐을 찾아 류블라냐행 버스를 기다렸다.
또 다시 한 두 방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금방 폭우로 변했다.
비는 오고, 버스는 안 오고,
작은 터미널엔 투어버스에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까지 있어 혼란스러웠다.
이러다 버스나 탈 수 있을까 싶은 순간에
거짓말처럼 버스가 내 앞에 섰다.
기사님께 티켓(6.3uro)을 사서 자리에 앉으니 긴장감이 확 풀린다.
발바닥은 불이 붙은 느낌이다.
그날의 메모에는 이렇게 써있엇다.
"빈트가르는 때려 죽인데도 못갔겠다..."
아무 생각이 없다.
류블라냐에 도착하면 무조건 쉬겠노라 작정하고 또 작정했다.
내일 아침엔 피란(Piran)으로 떠나야하니
방전된 체력을 충전하는게 급선무다.
그렇게 피곤한대도 잠은 안오더라.
창문에 붙어 흐렸다 맑아지는 하늘과 풍경에 사로잡히다보니
1시간 반이 훌쩍 지나갔다.
류블라냐 도착.
남은 오후는 욕심부리지 말고 그냥 푹 쉬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