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폰자 궁전이 두브로브니크의 경제을 담당한 곳이었다면
크네베브 궁전은 두브로브니크의 정치, 행정을 담당했던 곳이다.
이곳을 렉터궁전(Rector's Palace)이라고도 불르는데
"최고 통치자, 지도자"라는 뜻이다.
(크네베브는 같은 뜻의 크로아티아어다.)
성벽 투어 후 점점 뜨거워지는 태양도 피할 겸 두브로브니크 카드로 입장이 가능한 렉터 궁전을 찾아갔다.
과거 크레네베 궁전의 최고 지도자는
위원회를 통해 귀족들 중에서 선출했는데 재미있는건 임기가 고작 1개월이었단다.
장난하나?? 싶었는데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고.
선출된 사람은 1개월이라는 임기 기간 동안
절대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오직 업무에만 집중해야 했단다.
이 제도는 나폴레옹이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을 정복될때까지 이어졌고
모두 1,808 명의 최고 지도자가 배출됐다.
(여기서 드는 궁금증 하나! 서로 인수인계는 어떻게 했을까???)
렉터 궁전은 화재와 대지진으로 몇 번의 재건축이 되면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이 혼재된 독특한 건물이 됐다.
1층과 2층은 르네상스식이 주를 이루고 3층은 고딕양식을 주를 이룬다.
건물 안과 밖의 조각들은 15세기에 만들어졌는데
특히 아치를 떠받친 6개 기둥의 화려한 머리 장식이 내 눈길을 끌었다.
기둥 뒷쪽으로는 대리석 의자가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훌륭한 휴식처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나도 여기 앉아 오가는 사람 구경하면서 두브로브니크의 첫 식사를 해결했었다.)
궁전 입구에는 라틴어로 쓴 글이 있는데
"개인은 잊고 대중을 걱정하라"라는 뜻이란다.
(아름다운 말이다. 절실하고 간절한 말이기도 하고.)
궁전 안뜰에 있는 흉상의 주인공은 미호 프라카타(Miho Pracata)라는 사람이다.
그는 해양 도시 두브로브니그의 은행가이자, 자선사업가, 선장이었는데
프란치스코회 교회 건립시 엄청난 기부금을 냈고
사후에도 전재산을 국가에 기증한 인물이다.
그래서 1607년 미호 크라카타가 사망하자 이곳 안뜰에 흉상을 세워 그를 기리게 됐다고.
그리고 이곳 안뜰은 울림이 좋아 클래식 공연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음악회때는 1층과 2층에 좌석이 설치되는데
명당 자리는 역시나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2층 난간석이다.
내가 있을 때도 저녁에 클래식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공연시간이 임박해오면 티켓을 반값에 판매한대서 가봤더니
이미 연주가 시작돼 입장이 불가했다.
2층으로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쪽에 마치 창을 쥐고 있는 듯한 독특한 모양의 손잡이게 눈에 띈다.
모두 3개가 있는데 전부 오른손이더라.
2층 박물관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건
시계탑의 작동원리와 모양을 전시해 놓은 작은 방이었다.
눈금판 뒤로 크고 작은 테엽들이 저렇게나 많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유럽의 도시마다 시계탑이 명소가 되는 이유를 충분히 알겠더라.
그러니까 시계탑은,
과학과 예술이 집대성된 도시의 힘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시민들을 위한 실용품으로서의 가치까지 함께 지닌다.
그래, 기술의 진보는 이래야만 한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누구에게나 쉽게...
그리고 이게 바로 광장 높이 설치된 시계탑의 진정한 존재이유가 싶다.
크네베브 궁전 지하에는도 내전의 참상을 기록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곳의 사진은 특이하게도 전부 흑백사진들 뿐이다.
지하라는 공간과 흑백의 사진이 만나니
황폐함과 고통의 흔적이 훨씬 배가되어 다가온다.
사방에 불에 타 연기로 자욱한 건물들이 가득하다.
빗발같이 쏟아진 총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벽과 거리들.
사람들은 이 모든걸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견디고, 버텨내면서 두브로브니크를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재건했다.
살을 찢는 고통을 이겨내야만 만들어지는 진주.
그렇게 두브로브니크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답고 진주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