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화 앨빈과 조강현 토마스!
사랑스런 작품 <Stoy of My Life>의 더 사랑스러운 두 사람을 다시 만나다.
역시 몇 번을 봐도 이 작품은 언제나 참 좋다.
뭉클하고, 아프고, 아득하고, 애잔하고, 쓸쓸하고 그리고 따뜻하다.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이야기구나 라고...
누구나 그렇지 않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항상 특별한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
그렇다면, 나 역시도 이 작품과 깊은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앨빈과 토마스 사이를 불같이 질투한다.
어쩌자고 이렇게 뭉클할 수가 있을까?
이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다운 사랑아!
"한 번 나타난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아"
토마스가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은 확실히 옳다.
이 이야기는 긴 세월 넘어 영원토록 내 안에 계속 남아있을테다!
결단코 그럴테다!
토마스와 앨빈은 서로 너무 깊게 사랑을 했구나.
지독한 사랑은 종말을 맞는다.
그 종말은 비극이었던걸까?
이 작품을 보면서 한번도 동성애 코드를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날 공연을 보면서는 지독하게 절실히 느꼈다.
동성애면서 동성애 그 너머에 있는사랑.
두 사람의 모습은 표현되어질 수 없는 아름답고 완강한 사랑이다.
토마스의 꿈이 시작될 특별한 선물을 고르고, 레밍턴 선생님의 장례식장에 몰래 숨어들어가고
첫 단편 소설을 읽어주고, 눈싸움을 하고, 그리고 헤어지고...
아이같던 웃던 토마스는 앨빈과의 첫번째 이별을 말하면서 울먹였다.
먹먹한 가슴은 결국,
앨빈의 "This is it"에서 고요한 통곡이 되어 몸 속을 울린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 나는 그에게 물어. 왜 죽어야만 했느냐고.
물론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아. 대답할 사람은 그가 아니니까.
그는 죽었으니까 자기가 왜 죽었는지 알아낼 수 없는 거야.
그가 왜 죽었는지는 내가 알아내야만 해.
그게 바로 이해라는 것이지,
이해란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야 ......
이 작품을 볼 때 한창 김연수의 <원더보이>를 읽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다 깜짝 놀랐다.
마치 앨빈과 토마스가 이 책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하긴 이 두 사람도 내겐 확실히 "원더보이"다)
토마스는 앨빈을 이해했을까?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러니 그들의 사랑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세 번의 장례식과 한 권의 책, 그리고 한 편의 영화
이 모든 이야기는 적어도 내겐 늘 특별한 이야기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정동화 앨빈과 조강현 토마스와 함께 있는 동안
나는 충분히 위로받고 따뜻했다.
이들이 내겐 천사 클라랜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