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 끄적끄적2018. 4. 19. 10:01

체코의 역사가 숨수고 있는 구시가지 광장(Staroměstské Náměstí).

1437년 이곳에서 종교 개혁자 얀 후스의 추종자들이 처형됐다.

그보다 앞선 1621년 30년 전쟁 때에는 27명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참수를 당하기도 했다.

지금은 천문시계 보수로 가림막으로 가려졌지만

그때 처형되었던 귀족들의머리가 놓어있던 자리에 1621년을 뜻하는 숫자와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있다.

1968년 "프라하의 밤" 당시에 이곳까지 소련군의 탱크가 들어왔었고

1989년 "프라하 벨벳 혁명"이 선포된 곳도 바로 여기,

구시가지 광장이다.

그야말로 체코의 피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있는 장소라 하겠다.

 

 

얀 후스(Jan Hus)는 체코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이다.

당시에는 특정 계층만 이해하는 라틴어로만 예배를 진행됐는데

얀 후스에 의해 처음으로 체코어가 예매에 사용돼 평범한 사람들까지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단다.

신학자였던 그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당시 카톨릭의 타락을 세상에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1411년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고

1415년에는 콘스탄츠 공의회로부터 이단으로 몰려 화형되기에 이른다.

(종교처럼 배타적이고, 종교처럼 잔인하고, 종교처럼 독단적인 곳이 없다)

구시가지 광장에 서 있는 얀 후스 동상은

1915년 그의 사망 5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전도연, 김주혁 주연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으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명소다.

얀 후스의 발밑에 쓰여진 문구는,

"진리는 승리한다"라는 뜻.

(정말 진리가 승리했음 좋겠다...)

 

 

한때 후스파의 본거지였던 틴성당은

하늘로 우뚝 솟은 첨탐을 가진 틴 성당.

1후스파의 본거지로 사용됐을때는

 두 첨탑 사이에 후스파를 상징하는 황금 성배와 보헤미아 왕의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30년 전쟁 후에 왕의 조각상은 지금의 성모 마리아상으로

황금성배는 녹여 성모마리아의 후광으로 만들어버렸다.

성당은 미사 시간 전후로만 개방하는데 입구가 숨거져 있어 잘 찾아야 한다.

두 번을 갔었는데

첫번째는 아예 출입문이 닫혀있었고

두번째로 아침 일찍 혼자 갔을 땐 출입문이 열려있어 철책 사이로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어두울거라 생각했는데 주제단의 긴 창 때문인지 의외로 아주 밝았다.

작지만 시간의 위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

 

 

구시가지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

말라스트라나 광장에 있는 성당과 같은 이름을 가진 성 미쿨라쉬 성당.

틴성당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이곳이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화합의 장소였다.

틴성당 바로 옆 건물은 "돌종의 집"

자세히 보면 건물 모서리에 앙증맞은 종이 숨어있다.

숨겨진 사연 하나쯤 있을법한데 찾아봐도 없더라.

특별한 local stroy를 기대했건만...

돌종의 집과 벽이 닿아있는 왼쪽 건물은 콜츠킨스키 궁전.

이곳 이층 발코니에서 1948년 체코의 공산당 통치가 선언됐다.

건물 1층은 한때 카프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상점이 있었고,

2층은 그의 가족이 살던 아파트였다.

예나 지금이나 광장에는 사람들로적였을테고니

조용하고 예민한 카프카의 성격상 이곳에서 글을 쓰는건 쉽지 않았을테다.

그러니까 아파트 주변 환경이 카프카를 황금소로로 이끌었고

황금소로 22번지 작은 집에서 그의 명작들이 탄생됐다는 이야기.

카프카 덕후인 내겐 예사로 넘길 건물이 아니다.

저 건물을 수시로 오갔을 카프카의 상상한다.

어딘지 우울하고 어두운 그의 뒷모습을.

 

내게 있어 프라하는,

카프카의 흔적들이다.

어쩌면 카프카와 동의어였는지도...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