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 끄적끄적2015. 5. 27. 08:34

스페인 여행은 바르셀로나 입성을 눈 앞에 두고 잠시 제쳐놓고 통영으로 옮겨왔다.

사전 지식도, 사후 지식도 없이 떠났던 통영 여행은 그저 사진을 옮겨놓는게 전부일 뿐이다.

빈약한 역사 상식은 나를 면목없게 했고,

맛집 탐방 같은 미각을 자극하는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충무김밥도, 멍게비빕밥도, 심지어 통영꿀빵도 못먹었다.

아니, 뭘 먹을 생각조차 잊었다.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이 여행의 테마는 "나 홀로 트레킹"이었다.

걷고, 또 걷고,

그러다 기다리고 다시 걷고...

생수를 사기 위해 작은 가게 앞에 멈추서서는 이런 생각까지 했었다.

혼자 전지훈련 왔구나...

밤이면 운동화에서 종일 시달린 퉁퉁 부은 발을 빼내기가 힘겨웠다.

"미안, 오늘도 고생했네..."

 

 

통영 케이블카 왕복 탑승권을 구입하는데 40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나서도 꼬박 1시간 20여분을 기다려서 승차.

사실 케이블카 자체에 대한 감흥은 거의 없다.

까마득한 높이와 길이에 대한 아찔함과 기웃뚱거리는 무게 중심에 대한 무서움 정도.

그런데 미륵산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초록빛 풍경에 모든게 페이드 아웃된다.

'뛰어내려도 괜찮을것 같아..."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태희가 했던 말.

정말 그럴 것만 같다.

눈 밑에 펼쳐진 저 초록의 세상이 한없이 푹신해보여

그대로 한참을 떨어져 바닥을 추락한대도 정말 말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저 초록의 양탄자가 나를 감싸 완벽하게 지켜내줄 것 같았다.

뛰어... 내리고 싶었던건가!

어쩌면 그랬을지도...

대책없는 생각을 내치기 위해 눈길을 돌린다.

한가운데 있음에도 원색의 우체통때문에 구석에 있는 것 처럼 느껴지던 정지용 시비.

밑돌이 표시하는 도로원표의 거리만큼이나 이제 정지용은 사람들에게 너무 먼 거리다.

도저히 좁혀질 수 없는, 그래서 닿을 수 없는 거리.

그게 나는 또 측은하고 안스러워 굳이 그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천천히, 그러다 급격히 뒤로 밀려나 결국은 잊혀지는 것들을 위로하며...

 

 

 

원래는 미륵산 정상에서 바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올 생각이었는데

조금 더 걷고 싶어서 일부러 미래사(彌來寺)를 찾았다.

그런데 가길 참 잘했다.

찾아가는 중에도,  미래사 안에서도 빛이 그때그때 보여주는 세상은

정말 미래였고, 극락이었고, 열반이었다.

누군가의 기원이 쌓이고 쌓은 돌탑을 지나면서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평토(平土)가 될 것 같은 무덤 앞을 지나면서도

그 버려진 한적함이 이상하게 포근하고 다정했다.

미래사(彌來寺)

내일이 석가탄신일이라 분주할만도 할텐데

이곳은 작은 사찰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조용하고 한적했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색색의 연등만이 햇빛 속에서 유일하게 소란스러웠다.

대웅전에서는 이제 막 누군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예불이 끝이 났는지

가족들이 고인의 유품을 하나씩 들고 밖으로 나선다.

추억과 회환이 담긴 조용한 발걸음들.

 

이런 모습이면 참 좋겠구나.

내가 귀천(歸天)하는 날도

이렇게 햇빛이 사태지는 날이라면 참 좋겠구나....

타인의 죽음 앞에 턱없는 소망이 피어났다.

 

 

햇빛 좋은 날,

꿈같은 귀천.

그런 날은 슬픔도 무겁지 않고

울어주는 이 없어도 서럽지 않겠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