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샤대학에 간 이유는 딱 하나였다.
시인 윤동주와 그가 존경했던 시인 정지용 시비를 보기 위해서.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였던 1942년 26살의 나이로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편입했다.
그 당시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일본으로 갈 수가 없었다.
히라노마 도주(平沼東柱).
윤동주가 일제시대 우리말로 시를 썼던건
어쩌면 창씨개명에 대한 죄책감을 시를 통해 씻어내고 싶었던건지도 모르겠다.
도시샤 대학은 1920년 간사이지방에 세워진 최초의 대학이다.
붉은 벽돌 건물은 그 당시에 세워진 것들이고
그 주변으로 현대식 건물이 이질감없이 배치되어 있다.
그 중 붉은 벽돌 건물 안으로 들어가봤다.
다행히 비어있는 강의실이 있어 살펴봤는데
강의실마다 책걸상의 모양도 다르고 배치된 모양도 다 달랐다.
공통점은 한결같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는거.
그러니까 여기 어띠쯤에서 윤동주와 송몽규가 수업을 들고
건물과 건물을 오가며 컴퍼스 곳곳을 걸어다녔다는 건데...
그분들은 알았을까?
훗날 독립된 나라의 후손이 당신들의 흔적을 찾아 이렇게 도시샤대학을 찾게 되리란걸.
건물 관리인에게 물어 찾아낸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
사실 관리인에게 물어보기까지 언니가 좀 망설였다.
빨리 물어보라며 재촉하는 내게 언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걱정돼서 그래"
"뭐가?"
"물어봤는데 모를까봐. 물어서 찾아갔는데 버려지듯 구석자리에 방치돼 있을까봐"
언니의 마음이 참 이쁘고 고마웠다.
다행히!
시비는 구석진 자리가 아닌 볕이 잘드는 곳에 외롭지 않게 나란히 서있었다.
찾는 사람이 많은지 한국어로 된 안내문까지 있었다.
어딘지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는 느낌.
맨날 힘들다 입에 달고 사는 내가 진심으로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힘듬의 비교치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나라도 있고, 부모님도 있고, 가족도 있고, 직업도 있고, 이름도 있고, 자유도 있는데..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