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끄적 끄적...2012. 8. 31. 07:50

<The Tale of Two Cities>

일시 : 2012.08.24. ~ 2012.10.07.

장소 : 충무아트홀 대극장

원작 : 찰스 디킨스

대본, 작사, 작곡 : 질 산토리엘로

연출 : 한진섭

음악감독 : 김문정

제작 : (주)비오엠코리아

출연 : 류정한, 윤형렬(시드니 칼튼)

        전동석, 카이 (찰스 다네이)

        임혜영, 최현주 (루시 마네트)

        이정화, 신영숙 (마담 드파르지)

        김도형 (마네트 박사), 이종문 (어니스트 드파르지)

        정상훈 (존 바사드), 박성환(제리 크런처)

        배준성, 임재청, 김용수, 전국향 외

 

그래, 내가 바랐던 게 이런 거였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극적인 스토리.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 앙상블에게까지 골고루 시선을 주면서 집중과 이완, 완급의 호흡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그런 작품.

게다가 음악은 장엄하면서 기품있어 마치 한 편의 웅장한 교향곡을 듣는 듯한 충만감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

<A Tale of Two Cities>는

조금씩 무뎌지는 내 오감을 깨우는 일종의 반란같은 작품이었다.

황홀하고 그리고 매혹적이다.

보는 내내 옴짝달짝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끈질기게 매혹적인 작품.

처음엔 분명히 천천히 끌렸을 뿐이었다,

그러다 급격히 쏠리고, 결국에는 어쩔 도리없이 일방적으로 완벽하게 홀리고 만다.

매혹은 위험하다.

매혹당하는 자 뿐만 아니라 매혹하는 자까지도 치명상을 입기 때문에...

지독하다.

이런 매혹은.

정말이지 견뎌내기가 참 힘겹다.

슬픔이든, 절망이든, 사랑이든, 아픔이든 그것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그래서 말하련다. 

견딤을 위해...

 

유혹 중 가장 강한 유혹은 닿을 수 없는, 결코 닿아서는 안 될 것에 사로잡혀버리는 경우다.

그리고 인간은 결국 파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유혹과 싸운다.

시드니 칼튼이란 인물도 이 치명적인 유혹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결국은 그 유혹과 싸우기를 스스로 포기한다.

아주 당당하고 고결하게...
눈으로 봐야만, 손으로만 만져야만 믿을 수 있는 사랑은 단수가 낮은 사랑이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보고 만지는 마음보다 훨씨 깊고 곡진하다.

오직 그 순간, 단 한 번만 들을 수 있는 생의 연주를 남기고 시드니 칼튼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게 정말 가능한 사랑인가?

결국 사랑은 어찌됐든 환영(illusionism)이다.

환영은 모든 디테일이 완벽할 때에 생겨날 수 있다.

환영을 보는 사람은 그런 이유로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까지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세세하고 완벽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환영을 보는 사람은 환영만이 유일한 현실이고 삶이다.

나는 결코 환영을 보는 사람이 아니다.

연극과 뮤지컬을 보면서 늘 저건 단지 극일 뿐이라고.

그러나 이번엔 좀 다르다.

이런 현실이 제발 어딘가에 있어주기를 꿈꾼다.

제기랄!

다시 사랑을 꿈꾸기 시작했다.

 

류정한의 시드니 칼튼은,

광활하고 처연한 비가(悲歌)였다.

놀랐다.

이 사람이 이렇게 섬세하게, 이렇게 세밀하게 표현하는 배우였던가!

그에게 일종의 변화가 왔음을 나는 눈으로, 귀로 확인했다.

(나, 류정한이란 배우를 안지 그래도 나름 꽤 오래됐다)

그렇다면 그에게 무대 배우로서 이런 변화가 온 계기가 도대체 뭐였을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었던 그 선택이 이유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표정이 훨씬 풍부해졌고 그리고 자유로워졌다.

지금껏 나는 배우 류정한을

섬세함조차도 크게 표현하는 배우라고 생각했었다.

큰 표현 속에 섬세함을 담는 배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두 도시 이야기>에서 배우 류정한의 표현은

너무나 섬세했고 또 섬세했다.

무대 위 그가 보여준 시드니 칼튼의 감정은 비현실적인 인물을 성큼성큼 내 눈 앞으로 현실로 느끼게 했다.

얼마나 놀랍던지...

1막이 런닝타임이 너무 길어서 지루하다는 평이 많은데

개인적으론 시간의 흐름 따윈 의식되지도 않을만큼 깊게 집중할 수 있었다.

reflection, I can't recall, If dreams came true

시드니 칼튼의 부르는 1막 넘버들은 한결같이 오래 그리고 깊게 기억에 담긴다.

특히 If dreams came true는 눈물이 저절로 흐를만큼 처연하고 슬펐다.

자신에게 온 가장 큰 행운이었던 한 여자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한 남자의 처연함이라니...

찰스 다네이의 행복에 겨운 목소리와 대비되는 칼튼의 목소리는

단 한 곡의 노래로 한 남자의 일생 전부를 다 토해내는 것 같았다.

아, 참...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아파온다.

결코 폭발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감정을 쥐고 흔드는 류정한의 시드니 칼튼은 참 힘겹고 힘겹다.

이런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류정한은 이 작품으로 자신이 힐링(heeling) 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나도 그랬으니까....

 

음악감독 김문정이 이끄는 22인조 오케트라라는 웅장했고

뮤지컬 넘버들은 아름답고 격동적이었다.

특히 남자들의 하모니(김도형-전동석. 류정한-전동석)가 주는 울림이 크다.

배우들은 앙상블까지도 너무나 환상적이고 훌륭했다.

솔직히 이들을 조연이라고, 앙상블이라고 칭하는 건 참 미안한 일이다.

그 순간들 만큼은 누가 뭐래도 완벽한 주연이었고 완벽한 무대 장악이었다.

배우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최대한 정확히게 셋트를 이동시키는 무대크루들 모습도 감동적이다.

(뒷모습을 보이며 앉아있는 무대 크루를 보면서 나는 참 따뜻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아! 그리고 푸른색(런던)과 붉은색(파리)의 조명도 압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 이 작품의 첫인상에서 한 발도 빠져나오 못한 상태다.

다시 보게 되면 객관적인 시각을 조금은 갖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오랫만에 웅장하고 거대한 작품을 만난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서 좀 걱정스럽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한 달에 한 번만 보자는 원칙을 정했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그 원칙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 

 

* 공연장을 나오는데 소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한 귀절이 계속 떠올랐다.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단 한번만 오는 거요"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