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 끄적끄적2015. 3. 10. 08:11

도대체 무슨 배짱이었을까?

마드리드에 혼자 머무는 3일간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처음 가는 길을 지도 한 장 없이 돌아다녔다.

세고비아도, 코르도바도, 심지어 마드리드도...

그냥 맘껏 헤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를 꼭 보겠다는 작정보다는 보이는 곳, 보여지는 곳을 보자고 생각했다.

돌아와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조금 후회되긴 하지만

내가 갔던 곳이 어디였는지를 뒤늦게 알아가는 재미도 제법 솔솔하다.

세고비아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아소게호 광장쪽으로 쭉 올라가다

산미얀 성당을 만났고  

(아소게호 광장도, 산미얀 성당도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찾아보고 알았다 ^^)

조금 더 올라가니 수도교가 나오고,

수도교를 올라가서 한참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다가 

마요르 광장에 들어서고

거기서 다시 세고비아 대성당으로 빨려들어가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데 그게 꼭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좀 많이 기웃거리고, 좀 많이 헤매다 갑자기 만나게 되는 것들이 내겐 신비감과 경이였다.

이번 여행은...

그러니까 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았다.

내게 늘 새로운 시간의 문이 열렸고 그렇게 열린 공간은 매번 나를 초대했다.

목적지는 없었다.

길을 몰라도, 길을 잃어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비에 젖은 마요르 광장은 차분했고

사람이 많지 않아 고즈넉하기까지 했다.

건물 사이를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걸으면서 광장의 테두리를 밟았다.

스페인이라는 나라...

참 광장이 많은 나라로구나...

시청앞 광장 같은 큰 광장에만 익숙한 나에게 스페인의 작은 광장들은 기이(奇異)까지 했다.

이 광장에서 마을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도 나누고 해마다 마을 행사도 열었겠구나.

두런거리는 작은 소리들이 환영처럼 흩어졌다

많이 부러웠다.

동네마다 나와 너를 "우리"라는 공동체로 묶어주는 광장이 있다는건

확실히 축복이다.


마요르 광장을 향해

두 팔을 크게 펼치고 있는 세고비아 대성당.

"대성당의 귀부인"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는데

성당 앞에 서니 그 이유를 저절로 알겠더라.

마치 온화한 미소를 띄운 어머니 품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비와 바람도, 그리고 타지에서의 낮섬까지도 다 품어서 보듬어줬다.

그래서였나!

3유로라는 입장료가 무색할만큼 꽤 오랜 시간 그 품 속에 파고들었다.

성당 내부의 정교한 조각들과 아름다운 성물에 왈칵 무섬증이 일기도 했고

성가대석과 커다란 악보들은 나를 거인나라 난장이로 만들어버렸다.

흐린 날임에도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실내로 쏟아져 내리던 풍부한 자연 채광은

저절로 은혜로움과 경의로움에 빠져들게 만들더라.

신과의 조우()

어쩌면 아주 잠깐동안이지만 그걸 느꼈던건지도 모르겠다.



안개처럼 흩뿌려지는 비.

세고비아에서 내가 만났던 연우(煙雨)는 

공교롭게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이기도 했다.

덕분에 골목길을 서성이는 시간도 길어졌고 카메라셔터도 바삐졌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지인(知人)의 발걸음처럼 친숙하게 다가왔고

산안드레스 성당도 동네 성당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서울에서라면 눈만 마주쳐도 피했을 냥이 녀석들과 사진찍기 놀이도 했고

(비록 창살 안에 있는 냥이들이긴 했지만...)

우연히 만난 스마일 그림 앞에서 주저앉아 한참을 웃어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 나란 사람... 이렇게 천진하게 웃을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이상하기도 했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낯선 내가 전혀 낯설지 않아서 

나는 제법 편안했다.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