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 끄적끄적2015. 3. 4. 08:59

일요일 오후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내게 첫번째 스탕달 신드롬이 일어난 장소.

스탕달 신드롬은 19세기 프랑스 문호 스탕달의 이름을 탄 병리 현상이다.

1871년 스탕달이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중

산타크로체성당에서 레니의 그림 "베아트리체 첸치"라는 그림을 보게 된다. 

그 순간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일종의 황홀경 상태에 빠져버렸다고...

책을 읽으면서 혹은 여행지의 풍경 앞에서 이런 유사한 경험을 하긴 했지만

그림 앞에서 스탕달 신드롬을 느껴본 적은 솔직히 없었다.

(언제나 늘 북적거리는 관람객때문에 차분하게 그림에 빠져들 여유가 부족해서였는지도 모르지만...)

하긴 스탕달 신드롬을 겪는 사람은 모두 관광객이라니 이해가 되긴 한다.



고야, 벨라스케스, 엘그레고 티치아노의 그림을 실제로 보는건 생각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한 작품 한 작품 앞에 설때마다 그림 자체가 내뿜는 아우라에 그대로 압도당해버렸다.

정말 어쩌질 못하겠더라.

발길을 옮기지도 그대로 두지도 못하고 어쩡쩡하게 머뭇거렸다.

차라리 이곳에 가지 말 것 그랬다.

일요일 오후 2시간 가량의 무료관람의 시간으로 프라도를 둘러보는건 허황된 욕심이었고 크나큰 잘못이었다.

여행객으로 일주일을 이곳에 머문다고해도 부족할 곳이다.

마감시간을 됐다며 퇴장을 유도하는 직원을 피해 어딘가 꽁꽁 숨어버리고 싶었다.

몰래 숨어있다 유령처럼 떠돌고 싶었다.

정말 진심으로....



벨라스케스의 작품 앞에서는 그림의 크기에 압도당해버렸고

엘그레코의 초상화 속 인물은 금방이라도 그림에서 걸어나올 것 같았다.

티치아노의 색감은 환상적이었고 그림 하나하나가 그 색감으로 인해 완전히 살아있었다.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기도 했고...) 

고야의 그림은...

마치 형광도료로 그려진듯 빛이 품어져 나왔다.

그것도 아주 미친듯이...

특히 "1808년 5월 3일"이라는 작품은 도록이나 화면으로 봤을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우라였다.

어렵게 어렵게 이 작품을 찾아 앞에 섰는데 

첫 느낌은 눈이 부시다는 거였다.

혹시 조명의 효과인가 싶었는데 순전히 그림 자체에서 발화(發火)되는 빛이더라.

이 작품 앞에 서면 시간이, 역사가, 분노와 절망이, 그리고 한가닥 간절한 희망까지 그대로 다 느껴진다.


또 다시 부러웠다.

이 작품들을 매일 볼 수 있는 마드리드 시민들이...

이번 여행에서 나를 제일 먾이 힘들게 했던건 이거였다.

더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지 못했다는거,

애써 찾아간 곳도 오래 있지 못했다는거,

그리고 그곳에 숨어버리지 못했다는거,


프라도 미술관을 나서는데

마치 애덴 동산에서 쫒겨나는 아담과 이브의 심정이 이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 나는 잠깐 천국에 있었구나...

그런데 그 천국을 지금 잃었구나...

이제 난 어쩌지...


프라도는... 

그렇게 나를 딱 죽고 싶게 만들어 버리더라.

Posted by Book끄-Book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