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고 꼽씹는 걸 엄청, 무지, 과하게 좋아한다.
(소도 아니면서 꼽씹기는....)
책, 공연, 그리고 사진.
책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는 배신없는 동반자고
공연은 주말을 함께 하는 애인같은 존재고
사진은 어느 날 느낌에 따라 챙겨서 집을 나서게 만드는 일종의 이벤트다.
여러가지 이유로 좀 줄이자고 작정하고 있지만
뮤지컬과 연극 관람은 특히나 일상의 탈출구이자 쉼표같은 존재다.
블로그에도 여러번 밝혔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고 꼭 챙겨보는 뮤지컬 배우를 꼽자면
단연코 류정한과 김선영을 들 수 있다.
연극배우는 남명렬과 김영민, 그리고 윤소정이다.
거의 유령회원에 불과하지만 가입되어 있는 싸이트도 몇 개 있다.
가장 오래된 싸이트는 역시나 건승정한!
OFF 모임도 두어번 참석했었고 단체관람에 숟가락 몇 번 올려놓긴 했었다.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카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가령 예전에는 배우 류정한보다 개인적인 이상형으로서의 류정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지금은 무대 위 한 배역을 책임지는 배우 류정한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다보니 공연 관람 성숙도와 공연장에서의 예의는 확실히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때때로 정말 어메이징한 성숙도를 보여 현장에서 놀랄 때도 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지만
건승정한 싸이트에서 OFF 모임을 소식을 보고 신청했다.
광클릭이라면 영 잼뱅이인 관계로 70명 안에 들 가능성은 당연히 없으리라 생각했다.
어? 그런데 이게 왠 일이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경우의 수가 발생해버렸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땐 사실 좀 난감하고 난처했다.
이 나이에(?) 그런 자리에 참석하는 것도 그렇고
워낙에 유령회원이고 태생이 비사교적인 성향이라 과연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명단에 올라온 이름 중에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양도를 할까 고민하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OFF 모임 장소를 향했다.
동승아트센터 1층 카페 "토트"
배우 류정한이 입구에 앉아서 들어오는 70명 전원의 이름을 또박또박 써서 한 장씩 전해준다.
일종의 티켓팅인 샘인데
아주 참신하고 딱 어울리는 "맞이기획"이라 놀랐다.
이곳저곳 꽤 정성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화려한 건 않지만 소박하면서도 따뜻함이 담겨있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게다가 오랫만에 만난 윤일 오라버니가 반갑게 맞아주셔서 쑥스러우면서도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도 기댈 곳이 한 곳이라도 있으니까 ^^)
지난 10년간의 시간들을 영상으로 보면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혼자 감회에 젖었다.
개인적으론 내게도 좋은 동생들을 많이 알게 해 준 고마운 곳이기도 하다.
(응답하라!!!)
이젠 가정을 꾸려서 예전처럼 함께 MT를 가거나 서로 만나기도 힘들어지고
연락도 뜸해졌지만
그 기억들은 여전히 나를 풍요롭게 하고 미소짓게 한다.
(다행이다.)
이들이 있어서 한때 나는 열심히 버틸 수 있었는데...
토크쇼 형식을 빌어서 진행된 OFF 모임은 따뜻하고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함께한 70여 명의 사람들은 예의 바르고, 배려심이 가득했고
사전에 공지된 주의사항들도 꼼꼼히 잘 지켰다.
그야말로 가족들의 모임, 딱 그런 느낌이었다.
정갈하고 깔끔하게 준비된 식사도 좋았고
모르는 이들끼리 서로의 시간들을 공유하는 모습도 다정했다.
이런 풍경 속에 들어가는 거,
참 낯설고 어색할 법도 한데...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끝까지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먼저 나오면서 잠깐이지만 류배우와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오래전 OFF 모임에서 함께 "Dangerous game"을 했던 걸 기억하고 있어서 놀랐다.
류배우도 나도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다는 사실에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내 꿈을 포기하게 만들었노라"고...
한때 공연비평을 꿈꿨었노라고,
그러다 알게됐노라고,
이제 더이상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됐다는 걸...
그래서 깨끗하게 포기했노라고.
류배우가 답한다.
"어쩌면 그렇게 포기한 게 더 행복한 일 일 수 있다"고...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했고, 완벽히 공감했다.
다행이다.
깨끗이 포기해서!
더이상 꿈꾸지 않아서!
사진첩을 뒤적이다 발견한 오래된 사진 한 장!
문제의 "Dangerous game"
기억이 새롭다.
(원래 내 사진 올리는 거 병적일 정도로 싫어하는데... 이번 한 번만은 예외인 걸로!)
나도 변했고, 류배우도 참 많이 변했다.
그래도 두 사람 다 훨씬 편안해졌다는 건 공통점이다.
예전에도 개인적인 사심같은 건 있어본적도 없지만
이번엔 어찌된 게 둘째오빠를 만나고 온 느낌이다.
(큰오빠는 여전히 윤일오라버니시고...)
피붙이에 대할 때 느껴지는 뭉클한 감정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참. 이상하지!
돌아오면서,
어쩌면... 어쩌면...
"건승하우스"는 결코 꿈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상상해본다.
건승하우스에서 고스프레처럼
어떤 날은 "지킬 앤 하이드" 버전으로
어떤 날은 "영웅" 버전으로
어떤 날은 "두 도시 이야기"나 "몬테크리스토" 버전으로
또 어떤 날은 "맨 오브 라만차"나 "스위니토드" 버전으로 가든파티 같은 걸 개최하는 모습을...
현실 같은 꿈, 꿈 같은 현실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impossible dream이 possilbe 하게 변하는 그런 곳!
참 가슴 뻐근하게 즐거운 곳이 되지 않을까?
오랫만이다.
이렇게 좋은 기억과 좋은 추억을
가슴 깊이 함께 담아본 게...
* 류정한 배우의 차기작이 결정됐다.
<몬테크리스토>와 <두 도시 이야기> 공연시기가 거의 비슷해서
어떤 작품을 하게 될까 궁금했는데,
예상대로 <두 도시 이야기>를 선택했다.
(두 작품 모두 출현하는 건 설마 아니겠지! )
개인적으로 <두 도시 이야기>를 하길 바했는데 다행이다.
류정한, 최현주, 카이, 신영숙 캐스팅을 다시 볼 수 있다니 생각만으로도 참 좋다!
샤롯데라니,
세번째 전관 단관을 꿈꿔봐도 좋지 않을까?
오! 이런!
<몬테크리스트>도 특별출현으로 10회 출연한단다.
류배우의 고민의 정도가 어느 정도 짐작된다.
두 작품 다 그에겐 특별할테니까.
옳은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선택을 했음에는 분명하다.
건승을 빈다.
진심으로!
- 사진출처 "건승정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