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 끄적끄적2017. 5. 24. 08:10

우지(宇治)의 상징이라는 등꽃은 멀리서 보면 꼭 라일락 같다.

등꽃은 보됴인을 만든 후지와라 가문을 상징하는 꽃으로

둘 다 한자로 등나무 등(藤)을 쓴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늘어져 흔들리면 등꽃의 모습이 참 운치있다.

풍경도, 바람도, 햇빛도 다 향기롭다.

하늘로 쭉쭉 뻗은 나무는

뜨거운 햇빝 아래 혼자 당당했다.

 

 

일본의 3대 녹차 산지답게 골목마다 녹차를 주재료로 한 음식점이 즐비했다.

그래서 일본에서의 첫 끼니도 녹차 모밀을 선택했다.

나는 가장 무난한 냉녹차 소바를 주문했고

언니와 형부가 주분한건 따뜻한 모밀소바.

고명으로 올려진 커다란 유부와 고등어 반토막이 낯설어 한참을 쳐다봤다.

맛을 보라는데.... 선듯 젓가락이 안가는게...

입맛조차도 모험심이라고는 제로인 나.

 

 

뵤도인을 뒤로 하고 우지강으로 향했다.

동지사(同志社) 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윤동주는

친구들과 함께 우지 강변을 찾았다..

그리고 이곳 어디쯤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

그때는 물론 몰랐었겠지만 

그의 생전 마지막 사진 될 한 장의 사진.

 

 

1943년 6월 경에 이 사진을 찍었고

그해 7월 14일 윤동주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수감생활을 한다.

그리고 1년 7개월 뒤 옥사.

사진을 보관하고 있었던 윤동주의 학우 기타지마 마리코는

그 모임이 징병을 피하기 위해 귀국을 결심한 윤동주를 위한 송별회 자리였고

그때 윤동주가 친구들에게 "아리랑"을 불렀었노라 기억한다.

타인의 기억에 내 마음조차 애뜻해진다.

그리고 올 해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곳 우지 강변에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가 세워진단다.

사실 기념비는 2007년 이미 만들어졌었는데 그동안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설치가 계속 미뤄졌었는데

2016년 우지시에서 건립을 최종 허가했다.

아직 설치가 된게 아니라 실제로 볼 수는 없었지만

기념비에는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두 언어로 새겨져있다.

"기억과 화해의 비"

기억이든, 화해이든 하나만 선택했으면 좋았을걸..

꼭 저녁뉴스 헤드라인을 보는 느낌이다.

 

 

우지강을 가로지르는 회색의 우지교(宇治橋).

일본에서 가장 외래된 다리라는데 석교(石橋)의 옛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현재는  콘크리트 다리가 생경하게 서있다.

일설에 의하면 우지교을 건설한 사람이 고구려에서 건너간 도등 스님이란다.

우지강의 물살이 너무 빨라 말(馬)조차도 발길을 멈추는걸 보고

사람들의 원활하게 이용할 수 있는 다리를 만들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다.

사실 우지교 보다는 멀리 보이는 주황색 다리에 더 눈이 간다.

아사기리교(橋) 아래에 <겐지 이야기>의 한 장면을 재현한 동상이 있다는데

문외한인 나는 <겐지 이야기>를 잘 몰라서 멀리서 다리만 바라봤다.

개인적으론,

두 다리보다 다리 밑에서 배를 모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뒤에 "3"이라는 번호판을 보니 무슨 경기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인가보다.

배 모양도, 복장도 특이해서 오래 쳐다봤다.

 

강변을 따라 뚜벅뚜벅 한참을 걸어 역사로 돌아왔다.

무인짐보관소에서 캐리어를 꺼너 열차에 오른다.

다음 목적지는 후시미 이나리 진자.

끝도 없이 이어진 붉은색 도리의 터널을 향해

열차는 유쾌하게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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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끄적 끄적...2016. 3. 29. 07:59

 

<윤동주, 달을 쏘다>

 

일시 : 2016.03.20. ~ 2016.03.27.

장소 :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극작, 작사 : 한아름

작곡, 편곡: 오상준

연출 : 권호성

출연 : 박영수(윤동주), 김도빈(송몽규), 조풍래(강처중), 김용한(정병욱) / 하선진, 송문선(이선화)

제작 : (재)서울예술단

 

조카들과 함께 봤다.

말년 휴가 나온 조카녀석 때문에 원래 예매했던 좋은 좌석은 이 녀석에게 양보하고

토월극장 3층에 올라가서 봤다.

토월 3층은 처음 올라가봤는데 1열 난간의 시야방해가 2층보다 훨씬 심각하더라.

그리도 군무와 조명을 조망하기엔 나쁘지 않았다.

주말 4회 공연의 시작이라 배우들의 컨디션 조절이 관건이겠다 생각했는데

"팔복(八福)"을 듣자마자 다른 생각 다 버리고 또 다시 몰입하게 되더라.

일단 무엇보다 조카들이 감동적으로 본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친숙한 윤동주의 시들을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감정으로 받아들인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개인적으론 2막 도입부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왼편으로는 윤동주가 책상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시를 쓰고 있고

무대 뒷편에는 "참회록'이 한줄씩 쓰여지는 장면.

첫공때는 오페라글라스로 윤동주의 표정을 보느라고 이 장면을 완벽히 놓쳤었다.

뭔가 이분되는 공간이 주는 서글픔이

그당시 지식인의 좌절과 아픔을 대변하는것 같아서 절절하게 다가왔다.

윤동주로 분한 박영수는,

아무래도 이 작품과 인물에 특별한 의무감 혹은 책임감이 가진 모양이다.

저러다 정말 기절이라도 하는건 아닐까 걱정될만큼 극강으로 감정을 이입시킨다.

덕분에 2막 후반부는 객석의 관객조차도 버겁고 무섭다.

폭풍같은 고요함이 휩쓸고 지나간다.

뜨거운 불길이 날카로운 얼음조각처럼 심장에 박혀온다.

또 다시 감당하기가... 힘들어지더라.

이번에도 역시 오래 삭힌 통증이 눈물로 흘러 나왔다.

배번 처음처럼 나를 무너지게 하는구나. 이 작품은...

조카들과 떨어져 관람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식민지시대를 산다는게 어떤 건지 나는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자신의 나라를 지배한 그 나라에서

유학생의 신분으로 버텨내는 고난 역시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다.

어떤 절망적인 감정을 덧붙인데도 다 부질없는 미사여구일 뿐이다.

작품 속에서 윤동주는 함께 갇힌 송몽규에게 말한다.

"몽규아! 먹어야 한다. 먹고 버텨야 한다!"

나는 한 번이라도 그래 본 적이 있었나!

버티기위해 차갑게 식어버린 한 덩어리 차디 찬 밥을 씹어 삼킨 적이 있었나...

 

부끄러운 호사(好事)가 한 둘이 아니다.

살아있으면 살아야 하는건데...

잉여(剩餘)도 이런 잉여가 없고

부끄러움도 이런 부끄러움이 없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죽는 날까지...

부끄러움이 없기를...

한 점...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6. 3. 8. 08:27

퇴근길에 시집을 샀다.

정음사에 출판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점 직원이 건네준 책은 9,800원이라는 가격이 민망할 정도였다.

1948년 초판본과 윤동주 육필 원고가 담긴 역사재중이라는 문집,

그리고 동시와 산문까지 시린 본책까지 모두 세 권의 책이 손에 쥐어졌다.

영화 <동주>를 보면서도,

3월 5일 방영된 다큐 <불멸의 청년, 윤동주>를 보면서도 생각했다.

그의 시들을 정성껏 정독해야겠다고...

 

막상 손에 세 권의 책을 보니 선듯 책장을 넘겨지지 않는다.

센치한 감상인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쉽게 이 시들을 읽어도 되나... 싶다.

마흔 다섯의 내가,

스물 아홉의 나이로 옥사(獄死)한 청년 시인 윤동주의 시들을 정말 읽어도 괜찮은건가...

뒷통수가 뻐근해왔다.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한 편씩 읽고 있다.

이 시어 하나 하나를 다듬으면서 참혹한 시대를 버티고 견디었노라 생각하니

슬프고 아프다.

이렇게 아름다운 슬픔이, 이렇게 아름다운 아픔이...

견딘다는건,

얼마나 처절하고 절박한 최후의 생명줄인지...

수 십 번을 다시 태어난대도 나란 인간은 알 수 없으리라.

한 점의 마지막 살처럼

한 방울의 마지막 피처럼

그렇게 읽어내야만 하는 시.

 

八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永遠히 슬플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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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끄적 끄적...2016. 2. 22. 08:31

일요일 아침 7시 30분에 영화 <동주>를 봤다.

지금까지 나온 이준익 감독의 작품은 거의 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그 중에서 <동주>가 가장 좋았다.

흑백은 확실히 신의 한 수였고

흑백 특유의 느낌이 암울한 시대와 맞아떨어지면서 뭔가 고요하게 가라앉는 느낌이더다.

게다가 흑백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영상미가 느껴졌고

중간중간 나오는 음악도 너무나 좋았다.

강하늘이 부른 엔딩곡 "자화상"도 너무 좋아서

오랫만에 엔딩크레딧이 끝날때까지 자리에 앉아있었다.

사실 영화 제목이 "동주"긴 한데 개인적으론 "몽규"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연기도 강하늘보다는 박정민이 좋았고

특히 마지막 취조 장면에서 동주와 몽규를 교차시킨 장면은 압권이었다.

그렇게 하지 못한게 한스러워서 서명을 하겠다는 몽규와

그렇게 하지 못한게 부끄러워서 서명을 못하겠다는 동주,

두 사람의 마음이 다 아프고 절절했다.

 

 

감히 말하건데 좋은 영화다.

상영관과 상영횟수가 적은게 한스러울만큼...

(일요일도 조조 7:30분과 저녁 늦은 시간 2번 뿐이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에 대해

나같은 이가 감히 뭐라 말 할 수조차 없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한 시대를 처절하고 아프게 살아냈던 그분들의 삶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한 장면 한 장면 진심을 다해 연기한 배우들의 조심스러운 마음이 그대로 전달됐다.

지금을 사는 내가...

참 많이 초라하고 송구했다.

나라는 인간은,

단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나라를 생각하고, 기억했던 적이 있나...

대답할 말이... 없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앳된 손을 잡으로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얼굴을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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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끄적 끄적...2013. 5. 13. 08:33

<윤동주 달을 쏘다>

일시 : 2013.05.06. ~ 2013.05.12.

장소 : CJ 토월극장

극본, 작사 : 한아름

작곡 : 오상준

미술 : 윤정섭

무대디자인 : 최수연

연출 : 권호성

출연 : 김수용, 박영수 (윤동주)/김형기, 이사후, 김백현, 하선진 외

        서울예술단원

 

이 작품...

참 나쁘다.

그리고 너무나 못됐다.

그래서 울컥울컥 설움이 복받친다.

설움보다 더한 눈물과 참혹함으로 도무지 말을 할 수가 없다.

모든 장면이 고통스러웠고, 모든 장면이 황홀했다.

이 좋은 작품을...

이 좋은 내용을...

어쩜 그렇게 고작 일주일만 무대에 올릴 수 있으냔 말이다.

까닥하다가는 못 볼 수도 있었단 말이다.

정말 죽도록 달리고 달려서 겨우 에술의 전당에 도착해서 착석했다.

작년에도 입소문보다 짧은 3일이라는 공연기간 때문에 이 작품을 놓치고 말았었다.

그래서 올해에는 절대로,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아서 이 나이에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런데 어쩌나!

이 작품때문에 아직 나는, 내 마음은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달을 쏘기 위해서,

전속력으로!

그리고 누군가 자꾸 내게 묻는다.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

"사람!"

 

서울예술단의 작품은,

정말이지 아름답고, 처연하고, 그리고 고결하다.

게다가 한아름 작가와 오상준 작곡가의 만남은 뭉클한 감동과 함께 파도같은 희열을 안겨준다.

이 작품은... 이 작품은...

도저히 말로 표현하지 못하겠다.

너무나 죄스럽고 너무나 송구스럽고 너무나 안타까워 

나는 여러번 고개를 숙였다.

또.로.록.

눈물이 떨어진다.

내가 감히 울어도 되나 싶어 나는 또 고개를 숙였다.

윤동주의 시가 이렇게 가슴을 치고 들어올줄은 몰랐다.

청년 윤동주로 분한 박영수의 입에서 낭독되는 시들은 그대로 절규였고,바람이었고, 희망이었다.

시가 모든 것이 될수 있다는 걸,

그 시가 또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아프게 아프게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았다.

"시(詩)"라는 단어가 이렇게 서럽고 아프고 눈물나게 참혹한 아름다움이라는 걸

예전엔 몰랐다.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내가 지금껏 알고 있었던 윤동주의 시를 완전히 다시 새롭게 알았다.

서시도.

비 오는 날의 인사도.

참회록도,

별 헤는 밤도...

다 아프고 아프고 아픈 시다.

 

뮤지컬 넘버들이 주는 감동은 정말 엄청난다.

윤동주의 솔로곡 "내가 잊었던 것들"과

이선화와의 듀엣곡 "얼마나 좋을까?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부르던 노래 "시는 무엇인가"

형무소에서 송몽규와의 듀엣 "먹고 버텨야 한다"

혼몽한 정신으로 마지막 절규처럼 부르는 마지막 넘버 "달을 쏘다"까지

모든 넘버들이 하나같이 깊은 울림과 떨림이 있다.

이런 작품.

다시 또 만날 수 있을까?

윤동주가 후쿠오마 형무소에서 생채실험 주사를 맞는 장면은

차마 바라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흑인영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사이에 몽규와 동주가 나누던 짧은 대사는

무딘 칼로 살을 저며내는 아픔이었다.

오늘은 언제고, 내일은 언제지?

고통스러운 건 오늘이고, 평온한 건 내일이 아닐까?

내일도 고통스런 태양이 뜨면 어쩌지?

서서히 의식을 잃는 윤동주를 보면서

눈물흘리는 것도 죄스러워 나는 참고 참고 또 참았다.

윤동주를 연기한 박영수는

도대체 이 장면들을 어떻게 견뎌낼까?

아무래도 이 작품 끝내고 나면 이 녀석 참 많이 힘들어지겠구나...

안스럽고 안스럽다.

박영수라는 녀석!

탄탄한 기본기를 가진 엄청난  배우가 될 것 같다.

표정도, 연기도, 노래도, 딕션도, 목소리 톤도 배역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20대 청년 안중근의 풋풋함과 젊은 고뇌, 그리고 비탄을 너무나 잘 표현했다.

(이 역할을 노련하게 표현했다면 과연 지금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을까?)

묘한 필모그라피를 갖고 있는 배우다.

연기할 땐 김재범과 정상윤의 섬세함을 떠올리게 하고

노래부를 때는 임태경의 부드러움과 깊이를 떠올리게 한다.

ㅅ발음이 살짝 부정확한 것까지도 임태경과 유사하다.

그러나 연기나 감정표현 면에서는 확실히 임태경보다 훨씬 좋다.

아직 어린 배우라는 걸 생각하면 그의  미래가 무서울 정도로 기대된다.

또 다시 반복해야만 하겠다.

이 녀석을 주시하자!

 

오랜시간 함께 작업을 한 서울예술단원들이 만들어내는 합(合)은 아름답워서 황홀했다.

한 장면 한 장면을 어쩜 그렇게 정성껏 연기를 하던지!

한 사람 한 사람 전부 정성껏 곱게곱게 씀다듬고 보듬어 주고 싶었다.

무대도, 영상도, 음향과 효과도 너무나 좋았다.

일주일이라는 공연 기간이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원망스러울수가 없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곁에 있어주지.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더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더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게.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무사의 마음으로

시리고 차가운 저 달을 쏠 수 있게...

 

좀 더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으로

무사의 맘으로 달을 쏜다.

통쾌하다

부서지는 저 달빛이

우습구나

쪼개지는 저 그림자

오늘도 내일도 나는 무사의 마음으로

너를 쏜다

시를 쓴다

삶이 쓰다

달을 쏘다

 

 

 

Posted by Book끄-Book끄
읽고 끄적 끄적...2012. 8. 13. 08:23

<바람의 화원>, <뿌리깊은 나무> 이정명이 새로운 소설을 출판했다.

이번 소설의 화두는 윤동주 시인이다.

드라마로도 대성공을 거둔 위의 두 소설을 제외한 다른 소설들은 사실 실망스러웠다.

나름대로 오랜 침묵끝에 이정명의 새 책이 나왓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도 성공한 전작들처럼 2권이라니 뭔가 다를 것도 같았다.

(2권이라는 정형화의 늪에 내가 길들여졌나?)

 

1917년 12월 30일 중화민국 종북부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출생.

1945년 2월 16일 그토록 바라던 해방을 여섯 달 남겨놓고 형무소에서 사망.

29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시인 윤동주.

확실히 그의 삶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겐 일종의 비밀스런 금서(禁書)이자 갚을 길 없는 빚이다.

 

<별을 스치는 바람>은 

윤동주가 하라누마 도주라는 이름과 645번이라는 수형번호로 수감됐던

호쿠오카 형무소의 한 간수 스기야마의 살인사건으로 시작된다.

조선인을 상대로 악명 높은 고문을 가했던 고문관이자

형무소에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우편물을 심사했던 검열관 스기야마.

그를 죽인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밝혀지는 진실들과 음모들.

그리고 거대한 거짓과 그 이면에 감춰진 진실들...

(출판사 홍보문구처럼 허접한 표현이 봉두난발한다...쩝!)

 

픽션과 팩트의 경계!

이정명은 팩션 소설에서 일종의 일가를 이루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전작들만큼 치열한 고증이 없는 것 같아 좀 아쉽다.

이번 소설은 픽션쪽에 더 많이 기운 것 같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

실제로 이정명에게 작가적인 상상력이 무궁무진했던건 아닌가 짐작한다.

그래도 윤동주가 동료 간수들의 대필 엽서를 통해 검열관을 서서히 설득했다는 설정은 대단하다.

(그건 확실히 강력한 최면이었고 깊은 중독이었다.)

문장은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란다.

그 문장을 통해 벗어날 수 없는 반복적이고 집요한 유혹으로 검열관을 교화시킨 윤동주!

...... 그것이 글이 지닌 힘일지도 모른다고, 모든 변화는 글에서 시작되었다. 한 줄의 문장이 사람을 변하게 했고, 한 자의 단어가 세상을 변화시킨 것이다 ......

문장의 미로에 빠져본 사람은 안다.

결국 그 문장에 끝장이 난다는 것을.

미로 속에서 헤매다 광인(狂人)이 되거나 혹은 그 문장을 섬기는 구도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다.

시(詩)가 말(言)의 사원(寺)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신성한 경전의 문구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그래서 윤동주가 아닌 일본인 간수 스기야마일 수밖에 없다.

윤동주에게 교화된 스기야마,

그의 무자비한 폭력은 그러니까 처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보호막이었다.

...... 스기야마가 죄수들의 이마를 찢어 놓은 것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죄수들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가혹한 매질로 그들의 목숨을 지켜온 것이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입힌 상처였다 ...... 

스기야마의 죽음으로 더이상 보호받을 수 없게 된 윤동주는 결국 의무조치 대상자가 되어  

일본의 생체실험에 이용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알고 있는 결말에 이른다.

그러나 아는 것과 이해하고 기억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총탄도 포탄도 아니란다.

그건 다름 아닌 바로 "글"이란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죽이는 데에는 단 한 줄의 글만으로도 족하단다.

생각해보면 역사 속에 서 있는 우리 모두는

그래서 글을 통해 전승되고 이어진다.

이정명이 윤동주를 다시 깨워낸 건 그의 말대로

진실을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광복절이 가까워서일까?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실제 책의 내용과 줄거리보다 나는 조금 더 암울했고 쓸쓸했다.

29살.

그의 나이는 두고두고 멍울진다.

그보다 한참은 더 살았음에도 마냥 허접한 내 인생 또한 두고두고 면목없다.

죄가 너무 크다.

 

* 문장이 사람을 정말 바꾸기는 하는 모양이다.

  이정명의 소설을 읽고 이렇게 반성문을 쓰고 있으니... 

Posted by Book끄-Book끄
달동네 책거리2009. 3. 30. 08:56

<동주야> - 문익환


     

 

  <윤동주(뒷줄 오른쪽)와 문익환(뒷줄 가운데) 모습>

 

 동주야


동주야

너는 스믈 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달 먼저 왔지만

나한테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앞에서

이렇게 구질 구질 늙어가는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다는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 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 몸 짓뭉게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의 잡히고 있다.



문익환 목사를 아시나요?

그럼 이런 질문은요?

배우 문성근의 아버지를 아시나요?

별로 TV를 보는 편이 아니지만 우연히 보게 된 화면에서 이 시를 만났습니다.

3월 18일 강호동이 진행하는 “무르팍도사”라는 프로에 영화배우 문성근씨가 나와 아버지 문익환 목사님에 대한 내용들을 술회하더군요.

그러면서 이 시가 소개가 됐습니다.

제가 뭐라고 감히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윤동주, 장준하 등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을 안고 사회운동, 통일운동에 남은 생애 전부를 걸었던 목사 문익환.

그 분의 타계한지 올 해로 꼭 15년이 됐다고 하네요.

제 기억에 생생한 모습은,

반쯤은 헝클어진 머리에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고 꼿꼿한 몸으로 항상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 있던 모습이었습니다.

종교인의 정치참여라는 게 익숙치 않았던 제 눈에 어쩌면 괴짜 노인네로 보였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1989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 후 귀국, 그러나 살벌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던 분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사회운동에 직접 뛰어들게 된 건 처음부터가 아니었습니다.

친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고 장준하”의 의문사를 계기로 50대 후반에 비로소 사회운동에 투신하게 됐다고 합니다.

60대와 70대를 펄펄한 청춘으로 다시 살기 시작한 문익환 목사는 마지막 17년의 삶 중 11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됩니다.

아들은 노구의 몸으로 옥고를 치루는 아비를 보고 간곡히 말합니다.

이제 그만 쉬시면서 글을 쓰시면 어떻겠느냐고....

아비는 그런 아들을 매서운 눈으로 한 번 바라봅니다.

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이제 시작이다!” 라고....

먼저 간 친구들을 떠올리며 산다는 건,

어쩌면 평생 자신의 어깨 위에 그 친구들의 의무와 희망을 함께 짊어지고 살아야만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부채의 느낌이든, 아니면 무언의 약속이었든 말이죠.

생체 실험으로 29살 청춘에 희생된 시인 윤동주, 그리고 일본군에 자원입대하여 탈출에 성공해서 임시정부를 찾아 죽음의 길이라고 불린 파촉령을 끝내 넘었던 장준하.

문익환 목사님은 이 두 사람의 남긴 삶까지도 책임지며 살아냈던 겁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나 혼자만의 삶을 사는 것도 너무 힘들고 버겁다고...

그런데 한 사람의 몸으로 누군가의 남긴 삶까지 끌어안고 그것도 내내 펄펄하게 살아낸 사람도 있다는 걸 느낄 땐, 가슴 저 바닥까지 섬뜩해집니다.

난 여전히 호사를 꿈꾸고 있다는 생각...

지독한 불평뿐인 제게 일침이 가해집니다.


......구질 구질 늙어가는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꽃이 핍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그리하여 우리 후손들이

이 산을 다시 넘게 하지않기 위해.."서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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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뭐라고...

감히 꽃을 피우고 싶네요...

Posted by Book끄-Book끄